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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훈 Aug 11. 2022

직장판, 『비열한 거리』

사람을 괴롭혀 나가게 하는 것은 범죄

노골적인 괴롭힘과 속수무책 굴욕감


추석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버틸지 말지 고민은 더 깊어만 갔다. 시간이 갈수록 결단하기가 더 어려웠다.

한편으로 제3막에 대한 준비도 속도를 냈다. 물론 아내의 몫이 컸다.


나는 회사에서의 내 입지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했다. 결단을 위한 관망모드로 돌입했다.

다만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생각은 확고해졌다. 특히, 직장에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현실에 기운이 빠졌다.

회사에선 견디기 힘든 일상이 계속되었다. 어느 때부턴가가 하루 종일 입에 달고 있는 혼잣말이 생겼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20년 회사 생활 중 처음 겪어 보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연구소 사장은 점점 내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다만 가끔씩 자리로 전화를 걸어 소장실로 불러들였다. 내게 짜증을 내었다.


우리 본사 연구소가 비협조적 이란다. 불만을 쏟아내며 내게 책망을 하듯 말했다.

나는 묵묵히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신 속으로 말했다.


"사장님, 저도 본사 싫어해요. 마음속으로 연 끊었습니다."


그러던 중 나와 자리를 바꾼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연구소 사장으로부터 질책을 받았단다. 업무 인수인계가 잘 안 된 거 같다고 조치 후 보고하라고 했단다. 내가 미온적인 반응을 보여서 일게다. 나는 그 프로젝트들에 대해서 질질 끌지 말고 그만 덥자고 주장하는 쪽이었다.


후배에게 말했다.

"O호야, 내가 지금은 평택 본사는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네.. 네가 군포로 올라 올래?"


다음날 후배가 군포로 올라왔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그의 뒤에 누군가 '씩씩'거리며 따라 들어왔다. 전의 그 직속 상사가 예고도 없이 후배와 함께 온 것이다. 그리곤 다짜고짜 말했다.

"야, 네가 안 온다고 해서 내가 왔다."


그는 본인이 인수인계 및 업무분장을 해주겠다고 했다. 평택은 지금 바쁘니 알아서 하라는 취지였다.


솔직히 그와 얼굴을 보기도 대화를 하기도 싫었다.

하물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굳이 찾아와서 훈계를 늘어놓다니 황당했다.


더욱 가관은 다음 순간 일어났다. 그가 언성이 점점 커지더니, 고함을 질렀다. 사무실 한복판에서 많은 사람이 듣고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후배를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팀장으로 부르고 하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좀 어이가 없었지만 대꾸하기 싫었다.

내가 풀이 팍 죽은 채 주눅 들어 있을 걸 기대했나 보다. 아마 좌천 때 매달리며 애원했던 것처럼, 고분고분 비위 맞추며 굽실대는 모습을 기대했을 수도 있다.


한 참 열을 내며 소리 지르던 그 상사가 깜빡했다는 듯이 일어섰다. 그리곤 연구소 사장에게 이야기하러 사장실에 들어갔다.


나는 후배를 따로 불러내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후배를 나무랐다.

"야.. 너 무슨 생각으로 고자질을 한 거냐? 이거 완전 나쁜 X이네.."


그들이 한편이 돼서 날 모욕 주는 것 같았기 때문에 배신감에 화가 많이 났다.

후배는 당황하며 본인이 무슨 이야기를 한 건 아니라고 했다. 오해하시지 말라며 양손으로 내 오른팔을 잡았다. 담배를 한 개비 빼어 물고는 불을 붙였다. 몇 모금 깊게 들이켜자, 쿵쾅거리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정말이지 그 상사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기필코 되갚아 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허나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내 처지에는 방법이 없었다.


한편으로 회사를 그만둘지의 판단에 자극이 되었다. 반대쪽으로 말이다. 내가 지는 것 같은 오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끝까지 살아남아 느닷없이 잘려 집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위로하는 척 다가가, 담담하게 이런 말을 하는 상상도 했다.


"아우.. 인상 펴요. 억울해할 것도 없잖아요. 그 능력에 그만큼 했으면 정말 오래 한 거예요. 일단 좀 쉬세요. 이제 애들 둘 취업시키고 장가만 보내면 되니까. 그래도 결혼비용 하고 전세 정도 얻어줄 비용만 준비하면 되니까. 두 명에 한 5억이면 어떻게든 되겠죠... 좀 부족하면 딴일 찾아보면 되잖아요. 돌아보니 할 일은 많더라고요. 몸도 건강하신데 뭐라도 하면 되니까 너무 걱정마요.."


이 정도론 한참 부족하지만, 그에게 들었던 말과 사뭇 비슷하다. 내가 좌천 명령을 받던 그때 말이다.

퇴직 때 집 말고 2억 모으는 게 목표라고 했으니까. 내 얘기 들을 만할 거다.

그냥 상상일 뿐이다. 독자님들 보시고, 저질이라 욕하진 마시라. 상상은 자유 아니었던가.


그래도 이런 상상,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사람을 괴롭혀 나가게 하는 것은 범죄



그 일이 있고, 시간이 좀 더 흘렀다.

전의 직속 상사로부터 갑자기 문자메시지가 왔다. 자신이 외근 나갔다가 오후 2:30경 방문할 테니 대기하란다.


나는 이미 선약이 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있을 부산 세미나 참석 차 오늘 내려가야 한다. SRT 고속열차 예매를 해놓은 상태였다. 좀 이르긴 하지만, 집에 들러 집안일을 먼저 처리해야 해서 일찍 나가봐야 했다. 짐을 챙겨 열차를 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가 온다는 시간이면 나가야만 했다. 더욱이 그를 보기 위해 일부러 일정을 연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다른 일정이 있다고 말하자, 그는 매우 못마땅해했다. 말은 그럼 어쩔 수 없고' 라고 시작했지만, 꼬치꼬치 물으며 시간을 내도록 압박했다. 차마 말을 직접적으로 못 했지만, 그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내가 간다고 하는데, 당연히 네가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야지.. 네가 감히.."

딱 그 정도의 느낌이다.


그와 길게 통화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지만, 특별히 할 말도 없었다. 하지만, 끊고 싶어도 끊을 수가 없었다.

제발 용건만 간단히 말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는 항상 전화 중간에 침묵으로 뜸을 들인다. 특히 후배들과 통화할 때 그랬다. 듣는 사람을 답답하게 하는 의도적 침묵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 통화 내용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핵심 요지는 내가 거기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힐책이다.

그럴듯한 아이템을 찾아서 사업화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내가 지금 하는 일들은 사업성도 없는 선행기술뿐이니 소용없다. 그마저 열정이 없으니, 거기 있을 존재의 이유조차도 없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비아냥대는 말을 했다.


"너 부장 몇 년차냐? 그 정도 됐으면 알아서 해야지. 일을 그렇게 밖에 못하냐?"


그리고 어떤 프로젝트 얘기를 꺼냈다. 왜 대표이사에게 진행 결과를 보고 안 했느냐는 것이다. 여러 번 찾고 질책했다는 것이다. 좀 생뚱맞았다.


사실 나는 따로 보고를 하는 연구소 사장이 있다. 특히 그 건은 추가 지시 때문에 최종 결정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대표이사가 내 보고를 기다리는 줄 몰랐다. 내가 대표이사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생각도 않고 있었다. 그 건으로 막 질책을 하기 시작하였다. 좀 어안이 벙벙하였다.



'이건 뭐지?'

사실 그 건은 그들이 관심조차 없던 일이다. 이상하단 생각을 했다.


'왜 몇 개월 동안 묻지도 않다가 갑자기 과하게 질책을 하는 거지?'


혼자 열심 질책을 해대다가 갑자기 전형의 얘기를 했다.

"너, 전OO이 집에 간 건 알고 있지?"


전형이 권고사직을 당한 지 며칠 안됐을 때다. 내가 들어서 알고 있다고 하자, 바로 한 마디 했다.

"너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어쩐지 지난 좌천 발령일이 떠올랐다. 대표이사의 인사혁신 분위기를 틈타, 내 앞에서 마음껏 호가호위를 하던 모습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대표이사 핑계를 댔다. 내가 동문 후배라서 대표이사가 봐주고 있는 것이란다.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집에 보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내뱉은 그 말이 참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대표이사가 부임해 오자마자, 둘이서 조직개편을 한답시고 나를 파내서 유배지로 보낸 것이다. 그들이 손발을 다 잘라내서 부하직원 하나 없이 일하는 중이다. 이젠 느닷없이 말년 부장씩이나 돼서 무능하다고 다그친다.



왜 그럴듯한 신규 아이템을 찾지 못하냐, 왜 일할 의지가 하나도 없어 보이냐..


기가 찼다. 이게 맞는 것인가?


그가 내게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싶었다. 30명이 넘는 인원을 갖고 연구소를 운영하면서도 3년 넘게 제대로 실적 하나 만들어내지 못한 사람이 말이다. 사실 그가 연구소를 맡은 지도 이제 5년 차에 들어가는 상황이다. 그는 아직까지도 연구소를 맡은 지 얼마 안 돼서 실적을 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런데도 내게는 한두 달 만에 실적을 운운하는 것이다.


거긴 실적도 없고, 하는 일들도 변변치 않다. 너는 그런 쓸모없는 조직에 의욕도 없이 월급만 축내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이렇게 회사엔 불필요한 사람이라는 굴레를 자꾸 씌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말을 생각 없이 듣다가 불쑥 나 자신에게 스며드는 뜻밖의 감정에 놀랐다. 그건 분명 패배감이었다.


나는 이미 그런 상황을 개의치 않을 정도로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다. 사실 부족하긴 하지만, 여차하면 결단할 수 있도록 은퇴 대책도 마련해 가고 있다. 인생 쓴 맛도 겪을 만큼 겪었다. 더욱이 그들이 그런 식으로 인신공격할 것을 뻔히 예상했기 때문에 준비도 돼있다고 생각했다. 상처받지 않을 마음의 준비 말이다.


정말 이상했다.

그들의 말을 듣다 보면, 심리적 영향을 너무 크게 받았다. 듣고 있으면 점점 내가 정말로 뭔가 크게 잘못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좀 더 듣게 되면, 무능하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기 시작한다. 정신과 육체가 오그라들고 위축되면서 한없는 자아의 붕괴를 맛보게 되었다.





'아.. 이거구나.'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절대로 모른다더니.. 그 말이 정확하다.

왜 그 많은 이들이 직장 내 괴롭힘에 속수무책 당했는지 알겠다. 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조차도 무기력하게 당해 버리는지 말이다. 심지어 정년을 몇 년 안 남긴 나이에도 극단적 선택을 하신 분도 있지 않던가. 그 참혹한 환경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당해버렸는지 충분히 알 것 같다.


한 번 그 덫에 제대로 걸리면, 누구도 빠져나올 수가 없다.

남들이 보면 그냥 그 환경을 벗어나면 될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죽어야만 끝난다.’



당신도 예단은 하지 말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머리로 충분히 생각해봤으니, 그 심정 잘 알고 있다고 말이다.


가해자도 전혀 이해 못 하잖는가. 당한 자를 제외하면 그 상황을 가장 잘 알 사람은 반대편 가해자다. 그들도 악마는 아니다. 질이 낮을 뿐, 크게 보면 똑같이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런데, 사망사건의 가해자가 되고 나면, 자기는 정말 억울하단다.


너무도 떳떳하다. 정의감을 내세우거나 본인의 일에 대한 프로정신을 갖다 댄다. 그런 사람일수록, 냉정한 판단과 과감한 실행력을 운운하며, 자신의 사람 다루는 능력을 자부심 있게 떠들고 다닌다.


사람을 괴롭혀 나가게 하려는 것이 범죄임을 잘 못 느끼는 것 같다.




전혀 달콤하지 않은 사탕



그와 통화 중,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뻔한 얘기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더 할 얘기가 없는지, 느닷없이 중국 발령 얘기를 꺼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의미로 들렸다.


"내가 사탕 하나 줄려고 했는데, 너는 마음에 안 들어 못 주겠다."


사탕이란 전에 약속했던 중국법인 총경리(사장)로 가는 건이다.

네가 이 딴 식인데, 어떻게 총경리로 가겠느냐며 거기는 못 가는 줄 알고 있으라고 했다. 사실 나는 당연히 처음부터 중국에 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날 좌천 보낼 때, 그와 대표이사가 선심성 약속을 하듯이 말을 했다.

자기들이 동문 선배들이라서 크게 챙겨준다는 식이었다. 그땐 특별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고맙다고 말했다.



내겐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제안이었다. 아마 그들이 그런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내가 좌천된 파견지로 안 간다고 버틸까 봐 그랬을 것이다. 그러면 연구소 사장이 반대해서 파견 가있던 후배도 복귀를 못 시켰을 것이다.


그건 전체적으로 인사명령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단 의미다. 명령을 내렸는데, 집행이 안되면 사장으로서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맥이 빠지면, 강단 있는 일은 아무것도 못한다.


분명 그 때문에 그런 '사탕발림' 같은 소리를 슬쩍 흘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중국 발령 얘기는 좌천 발령을 내기 2주 전에 처음 나왔다. 직속 상사가 처음 그 말을 꺼냈을 때는 속 보이는 제안으로 느껴졌다. 누군가 갈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서 내게 떠 넘기 듯 제안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면 본인이라도 가야 할 상황이라는 말을 했다. 미리 갈 사람을 내정해 놓고 본인은 대상에서 빠지고 싶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임원급 발령을 낼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으면서,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리하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집안 사정으로 해외 근무는 어렵다고 말했다.


사실 그에게 굳이 우리 집안 이야기나 아픈 둘째 아이 이야기를 하기는 싫었다. 그러나 잘 못하다 엉겁결에 중국 발령을 내정할까 싶은 마음에 충분한 양해를 위해 말을 꺼냈다. 둘째 아이의 병이 전보다 더욱 심해져서 내가 멀리 갈 수는 없겠노라고 말했다. 그도 우리 아이가 아프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현재의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고 하면 이해할 줄 알았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중국으로 가라고 설득하려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


정말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구구절절 우리 집 상황을 얘기를 하는 상황까지 갔다.


나는 우리 둘째가 예후가 매우 좋지 않은 병으로 최종 진단받게 됐다고 말했다. 어쩌면 시한부 상태로 볼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까지 했다. 전례로 보면 보통 20살을 넘기기가 힘들었던 병이라는데, 지금 병의 진행속도가 빨라져 급격히 나빠지고 있는 중이다. 불과 1년 만에 거동을 아예 못하게 됐다. 지금은 하루 종일 침대나 소파에서 누워 있는 상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를 케어해야 하는 아이 엄마도 그 충격에 상태가 심각하다. 우울증이 심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해외로 나가면 온 가족 다 같이 죽자는 얘기로 보일 것이다.



나는 너무 구체적으로 말했나 싶으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까지 다 얘기했는데, 이젠 내 사정을 이해하겠지?'


만약 당신이라면.. 이런 얘기를 처음 들으면, 어떤 말을 할 것 같은가? 글쎄.. 해줄 말이 마땅치는 않다.


그는 집안 사정이 안타깝게 되었다고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내 하고 싶은 말은 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사정을 회사가 다 들어줄 수는 없고, 회사에서 인사명령을 내리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너처럼 개인적인 사정으로 못하겠다고 하면 불공정한 것 아니냐고 했다. 누구는 명령을 따르고 싶어서 따르겠느냐며, 사정은 누구에게나 있단다. 막말로 회사는 인사명령을 내면 그만이고, 명령을 못 받겠으면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였다.



나는 그가 내 상황을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그저 남의 이야기 일 뿐이었던 것이다. 최소한 함께 한 솥 밥을 먹고 있는 동료에게 할 소리로 들리지는 않았다.


날 설득하려고 굳이 도움도 되지 않는 불필요한 말들을 했다. 주변에 심심찮게 아픈 가족 있는 사람들을 보는데, 결국 가족들은 잘 견디고 잘 산단다. 우리 아이가 아픈 것을 각 가정에 하나씩 있는 골칫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도 고생이 많았다는 얘기를 했다. 둘째가 중2 사춘기 때 방황이 심해서 키우느라 많이 힘들었단다.


나는 평소 우리 둘째가 너무 이쁜 나머지, 하얀 화선지같이 깨끗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듣자, 화장실에 쌓아 둔 신문지 같은 취급을 받는 듯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기 싫어 본채에서 가장 먼 곳에 설치한 재래식 화장실. 그 안에서 은밀하게 치부를 닦아내는데 쓰고 바로 없애버리는 그 누릿 누릿한 신문지 말이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세상 빛 볼 릴 없는 숙제거리.


그의 말은 내가 중국 건을 결정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픈 아이를 가진 부모에게 위로가 되는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말에서 묻어나는 몰인정함 때문에, 인간으로서 벽을 쌓게 될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것을 몹시 후회하였다.




결과적으로 좌천 발령으로 혼이 빠진 상태에서 사탕발림 같은 그의 말에 약속을 한 꼴이 되었다.

좌천지에서 5~6개월만 버티고 있으면 승진시켜 중국 법인 사장으로 가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궁지에 몰아놓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때? 이젠 생각이 바뀌었지?"


이쯤 되면 내가 중국이라도 가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것은 그가 우리 가정 상황에 대해서 공감을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우리 천사 같은 둘째 아이와 아이 케어에 지쳐있는 아내를 버려두고 해외로 나갈 수 있겠는가…


현실을 너무 모르는 생각이다.




정말 그를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이런 이유로, 중국 건은 없던 일로 하겠다는 그의 말에도 나는 전혀 대수롭지 않았다.

그가 어린아이 희롱하듯 사탕을 줬다 뺐는 짓거리를 했음에도 괜찮았다. 조롱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만 기분이 조금 나쁠 뿐이었다.


그는 이어서 또 다른 얘기도 했다.

중국이 물 건너갔으니, 내가 계속 회사에 다니면 언젠가는 본사로 돌아오는 길 밖에 없단다. 그런데 그 건 곤란하다고 했다. 본사로 돌아오면 자리를 놓고 여러 사람 피 터지게 싸워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러고는 노골적으로 본사에 네 자리는 없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그 말이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헷갈렸지만, 그냥 무시했다.



다음날, 예정대로 부산으로 출장을 갔다. 나는 전날 같은 사무실에 있었던 타사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내가 없는 사이에 사무실에 왔던 직장상사가 어떤 말을 하더냐고 물었다. 먼 귀로 들리긴 했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 얘기를 계속했단다.


그는 여러 차례 자기가 보자고 하는데도, 내가 일정을 조절 없이 그냥 가야만 했었느냐며 직원들에게 짜증을 내었다고 한다.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고 일할 의지가 없는 놈이라고 욕을 해대는 것 들었단다. 계속 투덜대긴 했는데, 그 외는 자세히는 못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직원도 확실히 기억나는 말은 있단다. 모두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했기 때문이다.


“ 여기에 '전OO'이 같은 놈이 또 하나 있었네.”




버틸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정답은 아직 찾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회사에서의 내 존재감은 급속히 작아지고 있었다. 의아해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나는 '이미 끝났다'라고 받아들인 듯했다.


게다가 그와 부딪히는 일이 생길 때마다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것이 가속화됐다.


좀만 더 버텨보려고 저런 사람에게 굽실거려야 한다는 것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부산 출장기간과 그 주 주말이 끝나는 날까지.

그 기간 내내 그에 대한 생각에 치를 떨어야 했다. 잊어보려 노력해도 어느새 다시금 분이 차올랐다.



지금 이 상황.

그 사람 대신에 생각나는 수십 명의 과거 선배들을 하나씩 대입해 보았다. 어느 누구를 대입해봐도 절대로 상상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내게 그 처럼 무도하게 갑질을 하며 행동했던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냥 직장에 상사일 뿐인데, 스스로를 굉장한 권력을 가진 자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나를 그의 맘대로 아무 말이나 해도 괜찮은 하수인쯤으로 여기지 않고는 이럴 수 없다.


한편으로 내가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나는 나름대로 권위적인 그를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상사에게 하던 것과는 다르게 대했다. 항상 그에게 질책을 들을 때면 별로 토를 달지 않았고, 눈을 내리깐 채 듣고만 있었다. 그에겐 내가 무슨 요구에도 대꾸 없이 수긍하는 힘없는 약자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자신이 굴복시킨 약자란 생각이 들면, 마음 내키는 대로 한없이 가혹하게 구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나는 언제 어디서든 자기주장을 명확히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유독 그에게는 말을 아꼈다. 오해를 사지 않도록 주의하다 못해 웬만하면 알았다고 말하고는 입을 닫았다. 어느 순간 그가 누구보다도 많이 보수적인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로 밑인 나에게 조차도 VIP에게 의전하듯 자신을 대하라는 말을 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세상엔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가끔 어릴 적 길고양이 새끼에게 생선을 먹이던 그날 일이 생각난다.


그날 처음 본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 고양이였다. 생긴 게 너무 귀여웠다. 길들여 보고 싶었다. 살살 달래서 잡아다 목을 밧줄로 묶어뒀다. 그런데 내 마음도 몰라주고 사람을 심하게 경계했다. 어떻게든 말 잘 듣는 나만의 고양이로 만들고 싶었다. 부엌에 가서 엄니 몰래 아껴 뒀던 생선을 한 마리 꺼내다 앞에 던져줬다. 경계만 한 채 먹질 않았다.


한참을 참고 기다렸다. 그대로였다. 안 되겠다 싶어 고양이를 잡아끌어 생선을 입에 물렸다. 고양이는 심하게 발버둥 치며 내 손을 할퀴었다. 깜짝 놀라 땅바닥에 패댕이를 쳤다. 고양이도 나도 놀랐다.



그런데, 다음 순간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갑자기 화가 너무 나기 시작했다.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발로 고양이를 걷어찼다. 그래도 화가 안 풀렸다. 갑자기 몽둥이로 두들겨 패면 겁을 먹고 말을 잘 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목을 맨 밧줄을 끌어당겨 질질 끌고 다니며 막대기로 탁탁 때렸다.


그렇게 수분이 지나고,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다. 깜짝 놀라 바로 고양이를 풀어 주었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에게 이런 잔인한 면이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누군가 주위에 있었으면 모범생인 내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짐승 같은 잔인함도 숨어있다. 인간도 동물이니까. 그렇지만, 누군가 알게 될까 두려워 쉽게 꺼내지 못할 뿐이라고.. 아무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면 나 같은 모범생도 그냥 느끼는 대로 행동하는구나..


그날 이후, 난 평생토록 자신을 경계했다. 내가 혹시 아무도 모른다고 해서, 이성을 잃고 그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겐 내가 그 새끼 고양이처럼 보였던 게 아닐까?


그렇게 빗대어 보니 많은 것들이 일치했다.

잘 생각해 보면, 나를 고분고분 자신을 떠받드는 하수인으로 길들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처음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굳이 말할 건 아니지만, 박 부장도 잘 알듯이 이런 건 신경을 좀 써야 할 것 같아. 사람들이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다음엔 이렇게 말했다.
"나니까 너한테 말해주는 거야. 누가 이런 소리를 해주겠냐. 박 부장은 의전에 신경 좀 써야 할 것 같다."

나중엔 이렇게 말했다.
"박 부장, 내가 몇 번을 말했냐. 의전에 신경 좀 써라."

마지막엔 이렇게 말했다.
"이거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내 앞에서 말 편하게 하지 마.."


여기서 말한 의전의 대상은 고객이나 그룹 내 높은 고참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진짜는 자신에게 잘하라는 말을 돌려서 한 말이다.



딱 내가 10살 때 고양이에게 했던 것과 똑같지 않나..?


처음엔 잘해주면서 말로 달래서 굴복시키려 한다. 원하는 만큼 안되자, 집요하게 선생님 같은 훈계질을 해댄다. 다음은 두들겨 패서 굴복시키려 한다. 그리고는 마지막엔 될 대로 되라며, 패댕이를 친다. 치졸한 공작을 써서 망가뜨린다. 저질스런 말들로 내 면전에 대고 조롱한다. 나 없는 곳에선 직원들에게 쓰레기 같은 험담을 하며 나쁜 놈, 무능한 놈이라고 선동을 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인간답지 않은 저질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를 수도 있다. 아니면, 스스로도 지저분한 자신을 잘 알지만 멈춰지지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고양이에게 했던 것처럼.


'누가 이기나 보자.'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나도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조언하면 따르고 싶고, 훈계질을 하면 고치고 싶었다. 두들겨 패면 나도 아프다. 얼른 싹싹 빌고 고치고 싶다.

그런데, 난 그가 말하는 게 수긍이 안 간다. 심지어 뭘 원하는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그 새끼 고양이가 지금 내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애초에 욕심내지 말아야할 부분을 욕심냈다. 그가 뭐 얼마나 대단한 신분이라고 VIP 의전이라니.. 말 토시, 어투, 자세 이런 따위 것을 가르치려는 게 말이 되나? 말년 부장에게? (내가 처음부터, 딱 부러지게 의사표현을 못하고 너무 끌려 다니면서 방조한 건가?)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보통사람은 치졸해서 못할 짓이다. 우리 둘만 알고 있는 그 언행들을 누가 알겠나? 나같이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는 애가 자기 입으로 말할 것 같지도 않았으리라.


아무도 없을 때, 당신은 누구 인가?


그의 심리 상태가 이해는 간다. 말 못 하는 고양이에게 잔인해졌던 나와 같은 그런 상황이라면..


하지만, 나는 그때 철없는 10살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괴롭히고 있는 대상은 고양이가 아니다. 무려 사람이다. 그것도 어린애도 아닌, 4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는 40대 가장이다. 중학생 두 아들에겐 세상에서 최고로 능력 있고 멋있다며, 존경받는 아버지다. 회사 내에서도 누구보다 회사를 오래 동안 지켜낸 최고참 부장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나를 너무 쉽게 봤다.


그가 날 잘 모르는 부분도 있다.

나는 그렇게 멍하게 그의 얘기를 듣고만 있는 '어벙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비교적 머리가 좋아 기억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날 모욕 주려고 한 행동 하나하나, 그가 내게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거의 다 기억한다. 심지어 그가 말할 때 지었던 표정과 그 토씨 하나까지도.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용서가 안된다.


나는 그때쯤부터 그를 존중하던 마음을 싹 버렸다.

그가 없는 자리에서도, 심지어 집에서 아내에게조차 극존칭을 쓰던 그 습관부터 인위적으로 고쳤다. 더 나아가 그가 내게 했던 행동을 표현할 가장 적절한 말을 찾아 호칭을 붙였다. 양아치다.



나는 그의 성을 따서, 항상 'E아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정을 하고 그리 부르자 며칠 안돼 입에 착 붙었다. 금세 자연스러워졌다. 내 주변 모든 사람에게 내가 그를 'E아치'라 부르는 이유를 설명해줬다. 그 후부턴 우리 가족들도 나랑 절친인 직원들도 모두 그를 'E아치'라고 불렀다. 심지어 '아내와 나'의 친척들과 친구들, 지인들까지 모두 말이다. 이제 당신도 그렇게 부르게 될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자 기억이 흐릿해지고, 사건의 앞뒤가 꼬이기 시작했다. 내 머리가 많이 좋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내가 겪었던 그 사건을 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내가 잊어버리면, 그 사람 생각대로 될 것이다. 그 기막힌 일들은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까.




직장판, 『 비열한 거리 』



입장(立場), 서있는 자리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기 때문에 반대쪽은 보지 못한다. 그나마 배려 깊은 사람이라면, 그냥 저 쪽에서의 시야를 상상할 뿐이다. 그 정도도 훌륭하다.


사실 '제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이니, 어쩔 수 없다.


대표이사는 인적 구조조정의 칼을 등 뒤에 숨긴 채 부임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기존 인원을 정리하고 그 인건비로 전동화 전문 인력을 뽑아야 한다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쳐냈다. 허나, 내 좌천은 맛보기다. 숨은 붙여놨으니까.


실제로 전형을 정리하면서 본격적으로 그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시점에 자회사에도 2명을 정리하라고 숙제를 내린 모양이다. 그 결과로 자회사 안 차장이 대상이 되었다. 2주 뒤에 나가기로 벌써 정리가 다 되었단다. (안 차장도 50대 초반으로 아이가 셋이라고 한다.) 모두들 올해 개시를 했으니, 내년도에는 더 심해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편, 동료들과 얘기하다 보니 좀 다른 말도 들었다.


대표이사도 그렇고, E아치도 얼마 못 갈 것이란다. 내가 좌천 발령을 받던 날, 해고 임원 4명을 선정할 때 E아치도 후보 리스트에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다음번엔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머진 모두 신임 임원이다. 승진한 지 1년도 안됐기 때문에 제외될 것이다. 그가 아니면 대표이사 밖에 임원이 없다.




대표이사와 E아치는 겉으론 공생관계처럼 보인다. 지금은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경쟁관계라고 볼 수도 있다. 만약 E아치가 계속 버티고 있다 보면, 대표이사가 자리를 뺏기고 물러날 수도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회사에선 대체 가능한 후배만 있다면 오래 놔두지 않는다. 언제든 갈아 치울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익 집단인 회사는 임직원도 돈으로 보기 때문에 비용을 아끼려 한다. 아마도 대표이사도 그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늦기 전에 E아치를 사유를 만들어 정리해야 본인이 산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본인에게 그런 권한이 아직 남아 있을 때 말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 사이에도 곧 견제와 경쟁 심리가 생기기 시작할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이 정도 되면 보이지 않는 '생존게임'이라 부를 만했다. 자신의 처지를 한 치 앞도 모른다.


5년 전 자회사에 내려가 있던 대표이사와 수다를 떨다가 들은 말이 있다. 우리 동문 선배 중 한 명이 관계사에서 만년 부장으로 있다. 그즈음 어렵게 임원에 승진했었다. 대표이사가 내 귀에 대고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회장님이 그 선배를 임원으로 승진시킨 이유가 따로 있단다. 잘라버리기 위해서란다. 나는 과한 억측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선배는 지금도 잘 다니고 있다.)


그날 들은 회사 내 권모술수, 음모, 모략 관련된 얘기들에 놀랐다. 그때 생각했다. 이 양반이 남들 다 집에 갈 동안,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버티더니 이상해졌구나. 술수를 써서 직원들 잘라내는 방법으로 성과를 내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그래서 그쪽으로만 근육이 발달했나? 머릿속에 온통 암투 같은 것으로 가득해 보였다.


급기야, 내게도 조심하란 말을 했다. 너도 잘 나간다고 나대다가, 팽 당한다고.. 회장님, 총괄사장님이 뒤에서 내 얘기하는 거를 들었는데, 안 좋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단다. (거짓말. 그럴 리 없다. 그 높은 양반들이 없는 자리에서 내 얘기를 했을 리가. 멀리서 보니 내가 그분들과 실제보다 더 가까워 보였을 것이다.)


아마 본사 사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나부터 처냈던 게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그다음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평온하게 흘러가도록 놔두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회사라는 곳이 영화보다 훨씬 재미난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했다.


느와르 영화보다도 생생한 배신이 난무하는 곳.


나는 영화 『비열한 거리』가 개봉했을 때, 선후배 관계의 가식성에 충격을 받았다. 극 중 조인성 배우가 자신이 모시던 선배를 제거하는 것도 그랬지만, 자신의 오른팔 후배에 의해 느닷없이 배신의 칼을 맞았다. 영화지만 그 짐승 같은 잔인함이 참 충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가 15년도 더 지난 요즘에 와서야 현실은 그보다 더 잔인하다는 걸 깨닫는다.

기막힌 현실에 놀랄 때마다, 영화 속 장면처럼 상상을 해본다. 현실 속 선배들의 얼굴을 대입해서 말이다.


보스가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 속삭인다.

지시를 받은 주인공은 후배를 만난다.

"너는 나 믿지..?"

잘 구슬려 안심시킨 뒤, 돌아선 그의 등에 칼을 꽂는다.

발버둥 치는 후배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힘을 다해 목덜미를 끌어안는다.

마지막까지 '파닥' 대던 움직임이 잦아들자, 일 처리를 잘 끝냈다고 한 숨을 돌린다.


다음 순간,

자신의 등에서 '따끔'하면서 시큰한 느낌이 느껴진다.

'어.. 뜨겁다' 생각하는 순간, 불에 덴 것 같은 고통이 척추를 타고 순식간에 정수리로 올라온다. '찌릿' 전기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지자, 순간적으로 깨닫는다.


'칼이다.'


몸 안에 비집고 들어온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안다. 순간, 숨이 멎는 듯한 공포가 온몸에 퍼진다. 돌아서 보려고 애를 쓰지만,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안간힘을 쓰며 발악을 해보지만, 점점 머릿속이 흐려진다. 저 멀리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아따, 형님. 미안허요. 근디, 섭섭해 하진 마슈. 형님도 그랬잖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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