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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연 Aug 17. 2024

결혼이란 구멍 속에 빠져버린 것은-<여자의 일생>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319번.









  소설의 제목인 Une Vie는 '한 인생,  어떤 일생' 정도의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일본에서 '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것이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쓰여 왔습니다.  아름다운 처녀 잔느는 작품 말미에서 거의 폐인처럼 변해버린 불행한 노파로 그려집니다.  작가는 잔느의 일생을 통해  '인생에 대한 그 어떤 신뢰나 위안, 환상이 없음'을  적나라하게 증언해줍니다. 



 << 작가의 시선 >> -  귀족의 외동딸인 17세 잔느는 수녀원 학교에서 나온지 얼마 만에, 천하의 바람둥이인 쥘리앵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녀가 남편의 아이를 낳게 되면서 사랑의 환상은 깨져버립니다.  기대를 걸고 애지중지하던 외아들마저 매춘부에게 빠져 집안의 재산을 탕진합니다. 


  *  이제 수녀원에서 나와 마침내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되어서,  그토록 오래전부터 꿈꾸어 왔던 인생의 모든 행복을 이제 막 그러잡으려 하는 잔느는 날이 개지 않으면 아버지가 출발을 망설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침부터 벌써 백 번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  그녀는 사랑을 꿈꾸기 시작했다.  사랑!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점 커 가는 불안감이 이 년 전부터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었다.  이제 그녀는 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을!  그는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정확히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가  '그 사람'일 것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녀가 아는 것은 자기가 그 사람을 성심성의껏 사랑하고 그 사람 또한 자기를 애지중지해 주리라는 것뿐이었다. 


  *  유쾌하고 자유로운 삶이 잔느에게 시작되었다.  그녀는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기도 하고, 혼자서 부근을 배회하기도 했다.  그녀는 공상에 빠져 도로를 따라 느린 걸음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때로는 계곡의 모퉁이나 움푹 팬 잔디밭에 누워, 햇빛에 반짝이는 세모난 푸른 바다 멀리 수평선에 떠도는 돛단배 한 척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면, 그녀는 행복이 자기 머리 위에 떠돌며 신비스럽게 다가오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혔다. 












  *  결혼식에 앞선 두 주일 동안,  잔느는 애정의 감동에 지치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게 지냈다.  결정적인 날 오전 동안에도 그녀에게는 깊이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식이 진행되는 동안 성당 내전에서 비로소 제 정신을 되찿을 수 있었다.  결혼이라!  그녀도 이렇게 결혼하는 것이다!  


  *  그녀는 얼떨떨하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느낌이 들었다. 어제만 해도 그녀 생활에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품어 왔던 인생에 대한 희망이 거의 손에 닿을 만큼 더 가까이 다가와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처녀로 잠들었는데, 이제 부인이 된 것이었다.   (···) "이것만은 결코 잊지 마라.  너는 네 남편에게 완전히 속한다는 사실 말이야."   (···)그녀는 하나의 예감과도 같은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우수에 사로잡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  잔느는  (···)자신의 삶과 자신의 생각 속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것 같았다.  '내가 남편을 사랑했던가?'  하는 이상한 생각조차 들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불과 석 달 전에는 그 사람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는데,  이제 자기가 그 사람의 아내가 되다니,  그것은 무슨 연유인가?  발아래 뚫려 있는 구멍 속에 빠지듯 결혼이란 구멍 속에 이렇듯 빨리 빠져 버린 것은 왠일일까? 













 *  날카로운 아픔이 갑자기 그녀 몸을 찢어 놓았다.  그가 난폭하게 그녀를 소유하는 동안,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몸을 비틀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의 그 끊임없는 욕망에 대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반감을 느끼며,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 야수적이고 천박한 것,  요컨대 추한 것으로 여겨져서,  그녀는 체념은 하면서도 모욕감에 사로잡혀,  남편의 뜻에 역겨움을 느끼며 마지못해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  그녀는 두 사람이 마음속까지, 생각의 깊은 곳까지는 서로 통하지 못하리라는 것,  때때로 포옹은 할지라도 하나로 융합되지는 못한 채 평행선을 걸어가게 되리라는 것,  우리 각자의 정신적 존재는 일생 동안 고독하게 머물러 있으리라는 것을 처음으로 예감하며,  그와 자신 사이에 하나의 베일,  하나의 장벽이 놓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수녀원의 벽을 벗어나자마자,  그녀의 사랑의 기대는 곧바로 이루어졌다.  단 몇 주일만에 소망하던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에 이른 것이다.  급작스러운 결단으로 성사된 결혼과 같았다.  그 남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자기 품으로 그녀를 안아 와 버렸다.  그러나 이제 신혼 초의 달콤한 현실이 일상적인 현실로 변하려 했다. 그것은 막연한 희망,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매혹적인 불안에 막을 내리는 현실인 것이다.  그렇다, 이제 기대는 끝난 것이다.  












  *  쥘리앵과 그녀의 관계는 완전히 변했다.  그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로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마치 연기를 끝내고 본래의 자기 얼굴로 되돌아온 배우 같았다.  그는 잔느에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심지어 말도 거의 걸지 않았다.  사랑의 흔적 일체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가 잔느의 침실에 드는 밤은 아주 드물었다. 


  *  로잘리가 중얼중얼 대답했다.  "그 분이 저와 잤어요. 전 그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분 마음대로 했죠."   (···)낙담한 잔느는 자기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물방울이 소리 없이 그녀의 두 볼을 적셨다.  하녀의 아이와 자기 아이의 아버지가 같다니!  


  *  고통이 갑자기 심하게 재발하더니, 곧 견딜 수 없이 격렬해졌다.  악문 이 사이로 무의식적인 비명을 지르면서도,  잔느는 줄곧 로잘리를 생각했다.  로잘리는 전혀 괴로워하지 않았고,  거의 신음 소리도 내지 않았으며,  사생아인 그녀의 아이는 괴로움도 고통도 없이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지금 그녀는 남편에게서 하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기를 대하는 똑같은 귀찮음과 똑같은 무관심,  그리고 아버지가 되는 것에 화가 난 이기적인 사내의 똑같은 냉정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자 무서운 경련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  잔느가 놀라움을 표시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참 신기해요.  이젠 그 사람이 낯선 사람처럼 보여요.  제가 그 사람의 아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이의 야비함이 재미있다니까요."  그들 세 사람은 이유도 모른 채,  미소를 짓고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  어찌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던가?   (···)질투심도 증오감도 없었고,  경멸감만 일 뿐이었다.  그녀는 쥘리앵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같이 지낸 백작 부인의 이중 배반은 분노를 자아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배신자이고,  거짓말쟁이고,  위선자인 것이다.  그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그녀는 타락해 가는 모든 사람들의 양심 한가운데서 자신의 양심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시체 두 구가 보였다.  시체는 상처투성이에,  으끼지고, 피투성이였다.  남자는 이마가 끼지고 얼굴 전체가 으스러져 있었다. 여자는 충격으로 턱이 떨어져서 늘어져 있었다.   (···)모두들 사고라고 믿었지만,  그녀는 속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마음을 괴롭히는 비밀을 가슴속에 묻어 두고 있었다.  간통 사실의 인지,  백작의 그 갑작스럽고 무서웠던 방문,  바로 그날 닥친 재난 등. 












 *  "잔느,  너는 그 애 인생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없다.  네가 그렇게 하는 건 비겁하고 죄에 가까운 거야.  너는 너 개인의 행복을 위해 자식을 희생하는 거야."   잔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열을 터뜨리며, 눈물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너무 불행했어요······  너무 불행했죠!  이제 아들과 조용히 지낼 만하니까,  아들을 뺏어 가는 군요······ 저는 어떻게 해요······  혼자서······"


  *  "엄마, 아무 일도 없어요.  친구들과 어울려 놀려는 거예요,  저도 이제 그럴 나이잖아요."   (···)그녀는 폴에게서 자기 아들 풀레,  예전의 그 어린 풀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이제 컸다는 것,  더 이상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것,  늙은이들에게 개의치 않고 제 식으로 살아가려 한다는 것을 잔느는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잔느에게는 아들이 하루 만에 변한 것처럼 보였다.


  *  "그 애는 그 계집애 때문에 우리를 떠났어. 서슴없이 그런 짓을 한 걸 보면, 우리보다 그 계집애를 더 사랑하는 거지."   (···)잔느는 그 여자와 자기 사이에 악착같은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느꼈으며,  또한 아들을 타인과 공유하느니 차라리 아들을 잃는 편이 낫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기쁨은 모두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1만 5000프랑을 보냈고, 그 후 다섯 달 동안 아무 소식도 받지 못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절망적인 편지 한 통이 그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저는 망했습니다.  엄마가 구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총으로 머리를 쏴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이 확실해 보이던 투자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8만 5000프랑을 빚졌습니다.'   (···)남작은 다시 르아브르에 가서 조사하고 변호사,  사업가, 소송 대리인,  집달리들을 만나 본 후 드 라마르 상사의 결손이 23만 5000프랑에 이른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또다시 재산을 저당잡혔다.  금액이 막대했으므로 푀플 성과 성에 딸린 두 농장도 저당에 들어갔다


  *  그녀는 매매 계약서에 서명했다.  (···)잔느는 저녁 내내 울었다.  성이 팔린 것을 알게 된 후부터, 소작인들은 잔느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존중심만 보였으며,  별 이유도 없이 그들끼리 그녀를  '미친 여자'라고 불렀다.  아마도 그들이 그들 특유의 동물적 본능으로,  잔느의 점점 심해지는 병적 감상,  들뜬 망상,  불행으로  충격을 받은 가련한 영혼의 모든 혼란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  그녀는 아들에게 애절한 편지를 썼다.  (···)'나에게는 이 세상에 너밖에 없다. 그런데 너를 못 본 지 칠 년이 되었구나!  내가 그간 얼마나 불행했는지, 마음속으로 얼마나 너를 생각했는지 너는 결코 모를 것이다.  (···) 네 늙은 어미 곁으로 돌아와 다오.'













 *  잔느는 순간순간 되뇌는 것이었다.  "나는 평생 운이 없었어."  그러자 로잘리가 무섭게 화를 내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다면,  품팔이를 하러 가려고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했다면 어쩔 뻔했어요?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  태양은 그녀의 젊은 시절보다 얼마간 덜 뜨겁고,  하늘은 좀 덜 파랗고,  풀 역시 덜 푸르른 것 같았다.  꽃들은 색이 더 희미해지고 향기도 약해져서,  전만큼 사람을 완전히 취하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어떤 날에는 안락한 삶의 느낌이 그녀의 마음속에도 침투하여, 그녀는 또다시 꿈꾸고, 희망하고, 기대하기 시작했다. 


  *  갑자기 부드러운 포근함이,  생명의 열기가 옷을 통과해 다리에 이르더니, 살 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녀 무릎 위에 잠들어 있는 작은 생명의 체온이었다.  (···)자기 아들의 딸이었다.  밝은 빛에 놀란 연약한 생명이 입을 오물거리며 파란 눈을 떴다. 잔느는 아기를 꼭 끌어안고, 품 속에 들어올려,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로잘리는 기뻐하면서도 퉁명스럽게 잔느를 제지했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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