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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강 Apr 30. 2024

ARRIVAL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너를 선택할 수 있기를.

8월 31일까지 계약을 맺었다.

나에게는 두 번의 시험이 남았는데 그중 하나의 시험이 지나가고 있다.

모처럼 일찍 조퇴를 달고 싱그러운 해를 받으며 자전거를 타고 개천을 달려 집에 도착했다.

날씨가 좋다. 꽃이 피고 해는 따사롭고 이 학교의 아이들은 윤슬처럼 반짝인다.

5월은 행사가 많고 6월은 더울 테고 7월은 기말고사가 있고 8월은 방학이다.

그렇게 31일 날 나의 근무가 끝날 것이다.


작년엔 계약 종료일인 2월 29일을 디데이 카운터에 새겨 놓고 하루가 빨리 가기만을 빌었다.

그리고 올해는 또 다른 종료일인 8월 31일을 카운트에 적어 두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똑 123일이 남았다. 하루하루가 가는 게 아쉽다. 작년과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디데이를 문득문득 보곤 한다.

남은 하루하루가 아깝지 않게 하루를 열심히 보내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학교를 싫어하고 아이들을 싫어하고 학부모를 무서워했는데 사람은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인가.

그냥 무난한 회사와 무난한 아이들을 쥐어주면 좋을 텐데 내 삶에서 밸런스는 어디 엿이랑 바꿔먹었나 보다. 극악의 학교와 극호의 학교 어딘가에서 널을 뛰고 있다.


어디서 소문이 나버린 건지 아이들은 내가 9월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를 사생팬처럼 따라다니는 아이는 3월부터 내내 나를 보면 기뻐하다가도 금세 얼굴에 그늘이 진다.

나도 아쉽다.

코끝이 시큰해질 정도로 아이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준다.

맹맹해진 코를 가다듬고 나도 아이들에게 그랬다.

"너희들도 3학년이니까 어차피 내년에 이 학교 떠나잖아! 난 좀 일찍 가는 거고!"

애들은 12월까지 있다 가랜다. 그게 마음대로 되나 어디. 어이가 없다.

나도 그녀들의 체육 대회를 보고 싶고 예술제를 보고 싶고 졸업 꽃다발을 받은 모습을 보고 떠나면 좋겠다는 욕심이 든다.


괴상하다.


10년 가까이 일하면서 이런 마음이 든 건 처음이라. 울렁거리는 마음을 안고 출퇴근을 한다.

6개월의 계약 중에서 두 달 정도가 지났으니 이제 2/3가 남은 시점인데 나는 이별을 늘 헤아리고 있다.

사실 아이들 마음보다 떠나야 하는 내 마음을 먼저 돌보는 게 중요하다는 걸 많이 느끼고 있다.

이번 근무는 또 나에게 어떤 마음을 남겨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영화 <컨택트(영어 제목으로는 arrival)>를 자꾸 떠올리게 됐다.


영화 <컨택트>는 내가 좋아하는 드니 빌뇌브 감독이 연출한 SF 드라마 영화인데 언어학자인 루이스가 외계인과 언어로 소통을 하면서 그들의 언어와 체계를 이해하게 되며 삶을 받아들이는 그런 영화다.(요약이 조금 이상한데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선으로 시간을 이해하는 우리와 다르게 비선형적인 언어와 시간 체계를 사용하는 그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루이스도 그렇게 시간을 바라보게 되는 관점을 얻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인생에서 일어나는 기쁘고 슬픈 일들을 미리 보아 버린 루이스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영화를 볼 때에는 별 감흥이 없다가 요즘에 밀물처럼 그 영화의 의미가 다가오는 것 같다.


이 학교에서 일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지만 대충은 알고 있었다. 물론 기쁜 일도 있을 거고 또 두려운 마음도 너무나 있었고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 생각보다 결정은 너무나 간단하게 내렸다.

심플한 결정과 다르게 이 학교는 예상과 달리 나에게 풍성하고 복잡한 기쁨을 주고 있다.

계약이 끝나는 대로 또 기쁨만큼 커다란 슬픔을 줄 것 같다.

요즘은 그 헤어짐에 대한 슬픔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이 없어졌달까.

매일매일 애들을 보면서도 뭔가 아쉽고 그렇다. 내가 이렇게 아이들을 사랑하게 될 줄 몰랐다.

사랑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확한 것 같다.

애들은 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 또 이런 애들도 있다. 마음속 깊이 사랑하게 될 줄 몰랐다.

끝이 정해진 만남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을 매일 세우며 지내곤 한다.


어느 날은 나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아이가 내가 가는 것을 하도 서운해해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ㅇㅇ야, 네가 지금 어떤 일을 선택하게 되면 정말 감당할 수 없는 큰 기쁨과 함께 아주 깊은 슬픔을 얻게 될 거야. 넌 그러면 그 일을 할 거야?"

"아뇨, 전 슬퍼지는 게 싫어서 하지 않을래요."

"그러면 큰 기쁨을 얻을 수 없는데도?"

"네."

아이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그래서 아이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그 일을 선택할 거라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돌아가도 나는 그 일을 선택하게 될 거라고.

아이가 이해를 못 하는 눈치였지만 그게 내 마음이었다.


나는 이 모든 기쁨과 슬픔과 사랑과 이별을 껴안을 수 있을까.

늘 삶은 널을 뛰거나 줄을 타고 있고, 죽음이 있으면 삶이 있고 삶이 있으면 또 고통이 생기는데 나는 이걸 용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미래를 알아차리는 사람도 결정에 두려움이 앞서는데 한 치 앞도 모르는 내 앞날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기쁨도 몰랐을 텐데, 그럼 내 우울을 다시 가서 겪을 수 있을까.

나는 요새 그런 것들을 생각하곤 한다.


솔직히 다시 우울증을 마주 할 자신은 없다.

다시 마주한다면 나는 정말 죽을 것이다.

용기가 없다.

그 끔찍했던 때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고, 돌아갈 수 없다.


근데 또 생각해 보면 그 결과로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단단하지는 아니지만 얼룩덜룩한 내가 있다.

그래서 얼룩덜룩한 채로 내 선택들을 껴안아 보며 지내보려고 한다.


시험에 고통을 받지만 끝나고 마라탕을 먹을 생각에 행복해하는 내 아이들처럼.

무너지는 파도 위에서 춤추는 사람들처럼.


때로는 울고, 때때로 웃으면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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