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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냥 Nov 09. 2024

아주 사소한 짜증

  어떤 날은, 마음이 평온해서 한 번의 실패 정도는 너그럽게 눈감을 수 있다. 그러나 컨디션이 좋지 못하거나 마음에 불편감이 드리운 날에는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난다. 정신없이 오락가락하는 내 기분이, 복용 중인 약의 부작용 때문인지 원래의 내 성격 때문인지를 곱씹는다.


  짜증과 분노를 유발하는 상황들은 아주 소소하고 사사롭다. 가끔 뜬금없는 제삼자가 나에게 폭탄을 던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가 생활하면서 부딪히는 불편감에서 오는 짜증이다.


  어제는, 밥솥의 밥이 똑 떨어진 데다가, 밥솥이 아직 세척되지 않은 채 식기세척기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까지는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마침 우리 집 부식창고에 햇반이 가득했으므로 식세기가 세척을 끝내길 기다리며 햇반으로 끼니를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라라, 햇반의 끝부분이 어떻게 해도 열어지지 않았다.


  허벅지 사이에 햇반을 고정하고 한 손으로 입구를 열려고 해도, 이로 끝을 물고 햇반 위를 덮은 비닐을 벗겨내려고 해도 결코 열리지 않았다. 장애인을 단 1도 고려하지 않은 대기업의 만행에 화가 확 나면서 가위로 입구를 잘라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놔." 순간적으로 화가 차올랐고, 들고 있던 가위로 햇반을 난도질했다.(당시에는 화로 눈이 멀었었는데, 글로 쓰고 보니 내가 정말 사이코... 같다.) "x발!!!" 마지막 한방의 가위 난도질 뒤에 남은 건, 처참한 모습의 햇반 한 개와, 조각조각 부서진 플라스틱 싱크대 입구 마개였다. 승자는 그 누구도 없었다.


  근무 중인 남편에게 "왜 나는 손이 이따위여서..."라고 말하며 자학했다. 망가진 신체만큼이나 망가진 내 마음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이 미칠 듯이 부끄러웠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싱크대 상태를 보더니 "에이 이건 마개만 다시 사면 돼. 난 또 싱크대 다 부숴버린 줄 알았네."라고 말했다. 우스개 소리로 "햇반은 쑤셔도 되는데, 사람은 쑤시면 안 돼."라고 근엄하게 주의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전부터 내가 무언가를 시도할 때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과 마주치면 짜증이 났다. 언젠가는 잼 뚜껑을 열 때 도대체가 어떻게 해도 열리지 않는 뚜껑에 열이 받아 병을 주먹으로 미친 듯 내려친 적이 있다. 최근에는 스틱형 액상철분제를 먹으려 하는데 손은 고사하고 아무리 이로 물어뜯어도 절단면이 열리지 않았다. 순간 욱해서 더욱 거세게 입으로 물어뜯었더니, 남은 것은 입 안의 상처뿐이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가위를 쓰면 되었는데... 후회해 봤자 이미 너덜 해진 후였다.


  혼자 삭히고 삭히다 그 감정이 눈물로 터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과거에는 무심히 지나갔던 일들까지 한꺼번에 생각나 쉽게 울음이 그쳐지지 않는다. "합법적으로 접시를 깰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진지하게 남편에게 묻자, 남편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본 것이 생각난다. 설명이 어려운 답답한 감정을 스스로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재활의학과와 신경정신과 선생님께서, 내가 복용하는 약 '케프라'의 부작용 중의 하나가 '짜증'이라고 하셨다. 어쩐지, 특히 재활의학과 선생님께서 약 용량을 올리면서 틈틈이 내게 "막 짜증 나고 그러지 않아요?"라고 물으셨다. 그때는 "그다지요."라고 대답했는데, 신경정신과 선생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같은 약을 먹어도 다른 누군가는 이런 행동 없이 평온한 일상을 이어간다. 그렇기에 '약의 부작용 때문이에요."라고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굳이 말한다면 약 부작용 20%, 내 성격 탓이 80%가 아닐까.


  햇반 사건이 있고 나서, 남편과 외투를 챙겨 입고 소소하게 동네 산책을 했다. 평소에는 짧게 산책을 끝내는데, 이날은 남편이 꽤 멀리 빙 돌았다. 몸은 힘들었지만 덕분인지 이날은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남편의 계략인 셈이다.


  일상 속 소소한 불편함이 또 언제 나를 잡아먹을지 모른다. 그 모든 상황에 대비하여 경직된 상태로 매일을 대비하기도 힘들다. 그러니 그런 일이 있을 때 재빨리 불편함에서 눈을 돌리거나,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차근차근 해결해야겠다. 아니면 또 긴 산책을 해도 좋겠지.


  소소한 짜증과 분노가 나를 잡아먹지 않도록. 내가 나를 잃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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