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뭐 하지? 뭐 먹을까?" 목요일 퇴근시간이 되면 심장의 쿵쿵거림이 기분 좋다. 한껏 높아진 목소리톤도 거슬리지 않는다. 컴퓨터를 끄는 손길은 부드럽고 입엔 미소가 번진다. 일주일의 피곤은 그새 어디로 사라진 걸까? 동료들의 얼굴이 예뻐 보인다. 내 발가락에 온 우주의 기운이 모인 듯 몸이 그리 가뿐할 수가 없다. 아침 쓰러질 듯이 출근하던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무얼 해도 즐겁다. 약속이 있으면 있어서 좋고, 없으면 자유로워서 좋다. '그 사람을 만나서 뭘 할까?'도 좋고 '나 혼자 뭘 하지?'의 고민도 좋다. 평소 하지 않았던, 하지 못했던 것들의 향연. 늦게까지 산책을 하기도 하고, 안 먹던 치킨을 먹으러 가기도 하고 소파에 널브러져 보고 싶던 드라마를 시청하기도 한다. 목요일의 일탈은 나에게 피곤한 한 주의 끝을 알리는 팡파레이다.
더욱이 매일매일 간절히 바라는 것 중 하나, 저녁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커피러버인 나는 예전 하루에 커피를 5잔 정도 마셨었다. 그러다 몸이 부실해지며 한잔씩 줄여 지금은 하루에 한잔만 마셔야 하는 종착지에 와있다. 심지어 주중에는 오전에만 마셔야 하는 슬픈 마술에 걸려 점심시간 이후에는 진짜 고단한 게 아니면 입에 댈 수 없다. 오후에 마실라치면 그날 밤을 꼬박 새워야 하는 저주에 걸려버렸기 때문이다.
과거지향적 삶을 사는 나는 아직도 그 옛날을 잊지 못해 절절히 그리워한다. 어슴푸레한 저녁 더위를 몰아내며 집 앞 카페테라스에 앉아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저녁 먹은 후 살짝 허기져 마시던 고소한 카페라테, 눈 오던 밤 혼자 나와 호호 불어가며 마시던 뜨겁던 아메리카노, 친한 이웃과 야밤에 나와 카페에서 호호 수다 떨며 시간이 아까워 마시던 그 커피가 나는 그립다.
이 그리움이 넘쳐 나면 나는 딱 하루, 목요일밤에만 실행할 꿈을 꾼다. 목요일밤이 주는 신비와 만에 하나 밤을 꼴딱 새도 다음날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겠다는 망상 때문이다. 다만 밤을 새우는 것은 몸에 치명적이라 며칠 고생이니 지양해야 하나, 목요일밤의 매직에 걸리면 그런 염려 걱정 근심은 이미 목요일 아침이 꼴딱 먹어버린지 옛날이다.
한잔의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나를 유혹한다. 나는 그걸 마실까? 마시지 말까? 이걸 거절하는 건 몸을 챙기겠다는 현실적 선택으로 일찍 잠에 들어 휴식을 취해 다음 주를 덜 힘들게 보내겠다는 의지적 표현이다. 다만 매일 느끼는 감정의 연장선상이라 심심하고 무덤덤하다는 단점이 있다. 안전하지만 재미도 감동도 없다. 이걸 마시겠다면? 결론은 하나다.
난 미련하다. 이걸 마시지 않으면 당장에 5분만 괴로우면 되는데 끝내 나는 이걸 마신다. 아직 나는 나의 영혼이, 나의 그리움이, 나의 쉼이, 바람이 더 큰가 보다. 코에 쓱 들어오는 향기가 나는 일기계가 아닌 사람임을 인식하게 만들어 잠시 멈추게 한다. 입으로 머금는 한 모금은 넘어지지 않으려 힘주어 버티던 내게 힘을 빼어 축 늘어지게도 아예 누워버리게도 만든다.
그리고 나면 대략 5시간의 전투가 벌어진다. 몸은 자야 한다고 두 손 두 발을 들어 아우성이고 카페인은 절대 재울 수 없다고 눈을 부릅뜨고 방어하며 다 막아선다. 그 사이에서의 나는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고,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다. 각성작용으로 눈은 뜨고 있으나 눈시울이 점점 붉어져 충혈되고 심하면 실핏줄이 터져 피날레를 장식한다. 팔다리는 원숭이가 몇 마리씩 매달려 머 하나 들기 어렵고 이후 침대와 하나가 되어 내가 침대인지, 침대가 나인지의 영역이 모호해진다.
그렇게 새벽 5시 동이 터서 내 주위의 사물이 눈으로 인지될 즈음, 나는 내가 미련했음을 인정하며 항복한다. 그리고 다시는 밤에 이것 마시지 않겠노라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지만 혼자 읊조린다. 그렇게 항복한 뒤, 어느 틈엔가 잠이 든다. 여러 대를 맞은 것 같은 몸으로 2~3시간 만에 잠이 깨면 나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가족들의 핀잔과 비난을 견뎌야 하고, 끔찍한 얼굴빛과 더 끔찍한 컨디션을 겪어내야 한다.
여기까지 보면 앞으로 다시는 같은 짓을 하면 안 된다... 고 다른 이들은 결심할 것이다. 나는 다르다. 5펜스를 손에 잡아 그 맛을 알면서도 굳이 그것을 뿌리쳐 검지 손가락을 들어 달을 향해 치켜드는 미련한 사람이 '나'기 때문이다. 다 같이 가는 안락한 길도 내가 가야 하나 곱씹어 의심하며 어쩔 수 없이 가면서도 비판적 시선을 날려보기도 하고, 호기롭게 나 혼자 뒤돌아 서는 쓸데없는 오기도 부려보는 게 "나'다.
몸이 아파도 봤고 입원도 해봤고, 큰 수술도 하며 견뎌온 그 몸과 끝내나 타협해 주지 않는 미련한 사람이 '나'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 미련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