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상)
며칠만 방심해도 블랙홀이 되고 마는 곳.
어쩌다 큰맘 먹고 다 끄집어내어 정리해 놓아도 곧 엉망이 되기 쉬운
"냉장고 속"이야기이다.
냉장고만 열어봐도 얼마나 부지런히 음식을 해 먹고 정리해 놓는지
그 집안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나의 겨울왕국이 엉망인 이 순간,
누군가 그 문을 열게 되는 일이 생길까 봐 두렵다.
나는 여태껏 대형 냉장고를 가져본 적이 없다.
처음에는 대형 냉장고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서였지만
살림을 하면 할수록 음식을 많이 보관해 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냉장고가 작은 것에 대한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꽉 찬 냉장고가 나에게는 스트레스였으니까.
앞으로도 커다란 냉장고는 구입하지 않게 될 것 같다.
한때는 이 작은 냉장고를 꽉꽉 채워놓던 시절이 있었다.
한 달에 2~3번 쇼핑도 할 겸 장을 보러 대형마트에 갈 때면
집 근처 마트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갖가지 입맛을 자극하는 화려한 식재료와
오늘 꼭 사야 할 것만 같은 1+1 할인 상품들로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결국 다 먹지 못해서 버리는 재료가 늘었고 그만큼 낭비되는 돈도 많았다.
냉장고가 항상 꽉 차있으니 자연히 냉장고 청소는 연례행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대형마트를 끊고(?) 일주일에 한 번씩 집 앞 마트에서 장을 보기 시작할 때는
작은 마트라서 없는 것도 많았고, 자주 가야 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음식을 쟁여놓는 버릇을 고치기 위한 꼭 필요한 결단이었다.
매일 특별식을 해 먹는 것도 아니어서 집 앞 마트에서의 장보기 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는 집 밥을 해 먹을 수 있었고, 냉장고 음식을 다 먹으면 구연산이나
식초로 가볍게 청소하고 다시 채워 넣으면 되니 위생에 있어서도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안을 볼 수 없는 검은 봉지가 신선함의 상징인 냉장고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들여놓지 않는다.
냉장고 안의 검은 봉지는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때문에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용기에 담아 온 음식이 있으면
귀찮아지기 전에 투명하고 영롱한 밀폐용기에 옮겨 담는 일을 곧바로 실행한다.
미루고 미루다 어느 순간 열어보았을 때
“뜨악!!” 할 일이 생길까 봐서이다.
검은 봉지를 냉장고에 그냥 넣었다
곧 손질해서 옮겨 담을 거니까 이렇게 해도 괜찮아
하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하니 조금만 쉬었다가 하기로 하자
오늘은 귀찮은데 내일 하자
내일 한다고 해도 상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다음날도 하지 못했다
그다음 날도 바빴다
슬슬 불안해지는데…
이제 널 열어보기가 겁이 나
쓰다 보니 이건 뭐 공포영화가 따로 없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다른 할 일도 많은데 매일 냉장고에 매달려서 반찬 정리를 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용기 안의 음식은 나의 불안함을 없애주며
다음 식사시간의 메뉴를 미리 그려볼 수 있게도 해준다.
다른 공간과 달리 가족 구성원이 나누어 할 수도 없고,
오롯이 음식을 하는 사람의 몫이 될 수밖에 없는
막막하고 두통을 부르는 냉장고 정리.
피할 수 없다면 이제 내 살림 스타일에 맞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2주 정도는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테니
이 식재료로 냉장고 파먹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