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제 슬슬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다.
무엇을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가오슝 최대 크기 야시장이라는 육합야시장(류허야시장)이 숙소에서 도보 10분 거리라는 게 떠올랐다. 일단 미려도역을 먼저 구경하고, 류허야시장까지 이어서 보고 오기로 했다.
미려도역은 가오슝의 주요 지하철 노선인 레드라인과 오렌지 라인이 교차하는 환승역이다. 미려도라는 이름은 과거 포르투갈 선원들이 대만을 가리켜 '일라 포르모사(Ilha Formosa), 아름다운 섬'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입구부터 범상치 않다. 입구 역시 꽤 핫플인지 여러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많이 찍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내부로 들어갔다. 역 내부는 이름에 걸맞게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특히 일본인 다카마쓰에 의해 지어진 투명한 유리 외관도 아름다웠지만, 이 역의 상징은 뭐니 뭐니 해도 '빛의 돔'이라고 불리는 화려한 내부 천장에 있었다.
물, 불, 빛, 지구를 상징하는 4개의 구역과 총 6천 개의 유리장식이 천장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가면 하루 2~4차례 이곳에서 미디어아트 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굳이 그 시간을 맞춰서 가진 않았다. (그랬더니, 가오슝이 머무는 동안 한 번도 못 봤다.)
빛의 돔을 지나서, 역 내부를 구경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피아노 연주에 심취한 한 여성분을 보았다. 화려한 천장 장식과 그녀의 유려한 피아노 소리가 참 잘 어울렸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 않고 본인의 연주에 심취한 그녀가 참 부러웠다. 나도 그녀의 연주 덕분에 미려도역에서 한참을 머물며 잠깐의 휴식을 취해보았다.
미려도역에서 조금만 걸으면 바로 류허야시장이다.
가오슝 최대의 야시장이라고 하는 명성답게 낮에는 차도인데 밤만 되면 차량을 통제하고 순식간에 야시장으로 변신한다.
지난번에 고미습지 멤버들과 다녀왔던 펑지아 야시장에서는
“에.. 이건 제가 생각한 야시장이 아니에요.”라고 했는데, 류허 야시장을 보니 내가 생각했던 야시장의 모습 그대로라서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래! 이거지! 이렇게 노점상이 가득하고, 중간중간에 테이블 있어서 거기서 음식 먹고, 사격 게임 있어서 그걸로 인형도 받고 하는...
펑지아 야시장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방문했는데, 오늘은 혼자였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지 더욱 신중해졌다. 일단 수많은 노점을 쭉 살펴본 후 사람들이 줄 서있는 곳에 나도 은근슬쩍 줄을 서보았다. 총요삥 가게였다.
아저씨께서 미리 만들어 온 반죽을 찹찹! 늘려서 노릇하게 구워내시면, 아내분(으로 추정)께서 양념소스를 쫙 뿌려서 잘라주신다. 반죽을 굽는 고소한 냄새가 거리에 풍기자,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 둘, 대기줄에 합석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지난번에는 흑후추를 먹었으니, 이번에는 매운맛 시즈닝을 골라보았다.
"저 시즈닝 많이 뿌려주세요."
"네~"
너무 많다 싶을 정도로 시즈닝을 듬뿍 뿌린 총요삥은 냄새만 맡아도 침이 줄줄 고일 정도였다. 곧바로 한 조각 덥석 집어 먹어보았다. 고소한 밀가루 반죽과 매콤한 시즈닝의 조합은 역시 내가 상상했던 대로 맛있었다. 나의 탁월한 선택에 뿌듯해져서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내 발길을 붙잡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석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석가는 대만의 대표 과일 중 하나이다.
석가라는 이름은 석가모니에서 따왔다는 썰이 가장 유력한데, 과일의 생김새가 석가모니의 머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궁금한 것은 일단 먹어봐야 한다. 그런데, 석가의 모양새가 미묘하게 달랐다.
"사장님, 이 두 개는 왜 모양이 달라요?"
사장님은 친절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왼쪽은 일반 석가고, 오른쪽은 파인애플석가예요."라고 설명해 주셨다.
여행 가이드책에서 보고 늘 먹어보고 싶었는데, 무엇이 맛있는지로 모르고, 과일 손질은 더더욱 못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과일을 구입해 가기로 했다.
사장님께 "오늘 먹을 건데, 둘 중 뭐가 더 맛있어요?"라고 여쭤보니 파인애플석가가 개량종이라 더 달다고 하셨다. 그럼 그걸로 선택. 사장님은 과일 껍질이 거뭇거뭇하니 잘 익은 것으로 하나 골라 순식간에 손질해 주셨다.
총요삥을 먹으며 가는데, 총요삥의 짭짤한 양념 때문에 마실 것이 당겼다. 바로 눈에 띄는 가게에서 녹두우유도 하나 시켜서 마셔주었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먹을 것을 구입하는 것이 야시장의 매력이다.)
가판대에 아무것도 없어서 어리둥절하고 있었는데, 사장님께서 철판으로 뚜껑을 만들어 덮어놓고 계셨다. 주문과 동시에 철판 뚜껑을 열어서 빠르고 정확하게 음료를 만든 후 바로 뚜껑을 덮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음료 안에 먼지가 안 들어가게 하려는 사장님만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간식거리를 한가득 손에 들고,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빈 손으로 가서 두 손 가득 먹을 것을 들고 오니,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했다. 늘 저녁이 되면 “오늘은 대체 뭘 먹지?”하고 고민하고는 했는데, 오늘은 야시장에서 과일에 주스, 총요삥까지 저렴한 가격으로 넉넉히 사 온 것 같아서 뿌듯했다.
숙소에 있는 텔레비전을 켜자, 예전에 했던 한국드라마가 나왔다.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 소리가 반가웠다. 야시장에서 사 온 간식을 펼쳐놓고 나 혼자만의 만찬을 즐기기로 했다.
잘 먹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가오슝을 즐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