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오늘은 드디어 대만에 와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실행하는 날이다.
코로나19가 극심하던 시기, '확찐자'가 되면서 다이어트를 위해 시작했던 취미발레가 벌써 4년 차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대표 '뻣뻣 대장'이었던 내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까지 발레를 하겠다고 나설 줄이야. 발레를 갓 배우기 시작했던 당시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가오슝은 그다지 매력적인 여행지는 아니었다.
나는 로컬 색채가 진하고, 관광지화가 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지역을 좋아한다. 때문에 나의 초기 여행 계획은 타이난에서 펑후섬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만에서 취미발레를 하기 위해 그렇게 가고 싶었던 펑후섬을 포기했다.
한국에서는 예전부터 인기 있는 취미 활동 중 하나였지만, 대만에서는 최근 들어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발레가 조금씩 뜨고 있다고 한다. 물론 아직까지 일본이나 한국정도의 유행은 아니지만, 대도시를 중심으로 성인발레수업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고 하니, 4년 차 취미발레인으로서 꼭 한번 체험해보고 싶었다.
이를 위해 여행 오기 전부터 페이스북과 라인을 통해 각 지역의 학원들을 알아보았고, 가오슝 쭤잉구에 있는 clowen ballet학원의 선생님께 토요일 수업에 와도 된다는 답장을 받았다.
대만의 발레학원은 어떤 느낌일까? 한국과는 무엇이 다를까?
설레는 마음으로 한국에서 챙겨 온 발레용품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아! 일단 발레를 하려면 잘 먹어야지.
텔레비전에서 마침 <나 혼자 산다>를 하길래 그것을 보며 어제 먹고 남은 파인애플석가를 먹었다.
그리고 미려도역에서 쭤잉구로 출발했다.
설레는 마음에 너무 서두르다 보니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버렸다.
일단 고속철도역인 신쭤잉역에서 컨딩으로 가는 컨딩익스프레스 티켓을 미리 사려고 했더니 출발 당일날에만 판매한다고 하였다.
학원 시간은 12시. 약 2시간 정도 시간이 생겨서 쭤잉구의 대표 관광지인 롄츠탄(연지담)에 가기로 했다.
이때부터였나? 나의 지독한 판단미스가...
구글맵으로 봤을 때는 가까운 거리였는데, 막상 걸어보니 생각보다 많이 멀었다.
하지만 우버를 타기에는 왠지 돈이 아까운 기분이라 악착같이 롄츠탄까지 걸어갔다.
하지만 이곳의 랜드마크이자, 가오슝 관광의 상징과 같은 용호탑은 공사 중이었다. 아! 말도 안 돼!
(※최근 소식을 보니, 25년 1월 말부터 다시 재개장을 한다고 한다.)
이것을 보려고 여기까지 열심히 걸어온 건데!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걸어왔는데!!
공사 중인 용호탑의 모습을 모니, 허무함을 넘어 짜증이 몰려왔다.
그런데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곳에 오겠다고 결심한 사람도 나, 이곳이 공사 중인 것을 미리 알아보지 않은 사람도 나다.
아쉽지만, 언젠가 용호탑이 재개장되는 되면 그때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변수도 생기는 법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분노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다.
이 또한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하며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것. 여행을 하면서 나에게도 조금씩 스스로에 대한 너그러움과 여유가 생기는 듯하다.
공사 중인 용호탑을 지나,
롄츠탄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보니, 결국 체력이 바닥나버렸다.
발레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체력이 바닥나면 제대로 할 수가 없다.(발레는 꽤나 체력소모가 큰 운동이다.)
하지만 지금 밥을 먹었다가는 배가 불러서 제대로 수업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참을 갈등하다가 결국 우버를 불러서 학원으로 이동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발레학원.
낯선 외국인이 등장하자, 수강생들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커다란 키가 무척 인상적인 남자 선생님께 "저, 지난번에 라인으로 연락드렸던 한국인이에요."라고 인사를 드리자, 선생님께서는 정말 반갑다는 듯 "와! 어서 오세요! 어떻게 가오슝까지 발레를 하러 왔어요?"라며 환영해 주셨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선생님과 다른 수강생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한국에서도 성인발레를 하나요?"
"왜 대만까지 와서 발레를 해요?"
"한국 발레학원과 대만 발레학원은 어떻게 다르죠?"
"발레는 얼마나 배웠어요?"
쏟아지는 질문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마치 한류스타라도 방문한 것처럼 두 눈을 반짝거리며 질문을 하는 수강생들의 모습에 내심 이곳에 방문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은 건물 6층에 위치해 있었는데, 따스한 햇살이 연습실에 가득 들어와서 포근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대만에서 발레를 배우겠다고 다짐을 했을 때, 혹시라도 내가 선생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하는 고민이 있었다. 나름 10년 넘게 중국어를 전공해서 자신 있게 갔는데, 선생님 말씀을 못 알아듣고 어버버거리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대부분의 발레용어는 프랑스어와 영어로 되어있고, 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심지어 선생님께서는 외국인인 나를 배려해서, 발레 시범도 여러 번 보여주셨다.
한국에서의 발레 수업과 대만의 발레 수업, 둘 다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만 있을 뿐,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발레에 대한 수강생들의 열정, 선생님의 섬세한 가르침, 아름다운 발레 음악까지, 한국과 똑같았다.
대만에 와서도 발레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했다.
무엇인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발레'라는 하나의 공통점이 clowen ballet학원의 사람들과 나를 친구로 만들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취미활동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 아닐까?
나는 선생님의 배려로 60분짜리 수업을 2개나 들을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친 후, 우리는 모두 연습실 바닥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었다. 친구들은 한국에서 유행하는 발레복 브랜드와 발레용품들을 궁금해했다. 나 역시 대만의 발레용품에 관심이 있어서 우리들은 한참 동안 발레용품을 어떻게 어디서 구매할 수 있는지, 정보를 공유했다.
한국에서도 친구들과 '어느 발레복이 예쁘고, 어느 발레 슈즈가 좋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사용하는 언어만 달라졌을 뿐 이곳도 똑같았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갔다. 역시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구나!
이제 학원을 떠나야 할 시간. 우리는 서로 SNS주소를 공유했다. 자주 연락을 하자는 약속도 함께였다.
“나나야, 여기 맛있으니까 꼭 가서 먹어봐~!”
학원을 나와, 이동하던 중 '띵동!'소리와 함께 친구들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친절하게도 본인들의 추천 맛집 리스트를 구글맵 주소와 함께 잔뜩 보내주었다.
"와! 정말 고마워! 알려준 곳에 꼭 가볼게!"
"행복한 여행이 되길 바랄게. 다음에 가오슝에 오면 또 놀러 와! 같이 발레 하자!"
'같이 발레 하자!'
비록 언제 다시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는 약속이지만, 그냥 그 다정한 말 한마디, 작은 친절 하나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Clowen ballet 선생님께서도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한국에서부터 와줘서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수업과 환경이 당신 마음에 들었기를 바라요.
다음에 또 놀러 오세요. 언제나 환영합니다. 앞으로의 여행길도 순탄하기를....'
꼭 다시 가오슝에 가서 발레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발레 친구가 추천해 준 또우화를 먹기로 했다.
안 그래도 점심을 굶어서 무척 배고팠는데, 달콤한 또우화 한 그릇을 먹으니 지쳐있던 몸에 다시 힘이 나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맛있다!'
SNS에 또우화 사진을 올리자, 타이중에서 만났던 춘란에게 바로 연락이 왔다.
"나나! 너 여기 어떻게 알았어? 여기 진짜 맛있는 가게야! 정말 잘 먹었어!"
점잖은 춘란까지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메시지를 보낼 정도라니, 진짜 맛집이었나 보다.
체력이 회복되었으니 숙소까지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아이허를 지나서,
숙소 앞 단단 버거에서 햄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이번에는 치킨너겟이 있는 메뉴를 골라보았다. 단단 버거를 맛있게 먹어치우고는 침대에 벌렁 누워 한참 동안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는 다시 야시장 오픈 시간에 맞춰서 류허 야시장으로 향했다. 대충 운동복차림에 슬리퍼 하나를 질질 끌고 가는 모양새라니... 마치 가오슝 주민이 된 기분이라 길을 걸으며 나 혼자 실실 웃었다. 여행 8일 차쯤 되니 이제 점점 현지인화(化)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