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신베이터우에서 온천욕을 마친 후, 개운한 몸으로 단수이로 향했다.
이미 한 번 지나갔던 길이라 그런지 낯설지 않았다.
익숙한 길, 익숙한 냄새, 익숙한 대만의 하늘-
대만의 모습이 점점 익숙해지고, 정이 들어갔다.
베이터우역에서 단수이행 열차를 타고, 그렇게 단수이에 도착했다.
가끔 대만 여행 커뮤니티에서 일정을 어떻게 짜야하냐는 질문을 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하고 싶다.
베이터우와 단수이는 그냥 한 세트라고.
온천의 따뜻함과 바다의 여유로움을 하루 안에 함께 느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조합이 있을까?
체력과 시간이 허락된다면 스린 야시장까지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오늘은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버스정류장에서 길을 헤매던 내게, 대만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왔다.
“홍마오청에 가려면 저 버스를 타면 돼.”
아주머니는 마침 같은 방향이셨는지 함께 버스를 타셨고, 내릴 정류장까지 친절히 알려주셨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음을 나눠주신 그 따뜻함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렇게 대만은 또 한 번,
예쁘고 다정한 인상을 나에게 남겨주었다.
홍마오청에 도착하니 한국인 여행자들이 꽤 보였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부탁할 사람이 없어 고민하곤 했는데,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나가던 한국 분들께 부탁해서, 마음에 드는 인생 사진을 몇 장 남길 수 있었다.
그저 감사한 하루였다.
햇살은 쨍쨍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오늘도 날씨 요정이 또 한 번 나를 따라와 준 듯했다.
홍마오청 내부에는 당시 실제로 사용했던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공간 같았다.(웃음)
“나 전생에 공주였나 봐? 낯설지가 않네?”
가족 단톡방에 올린 나의 한 마디.
오빠는 코웃음을 쳤지만, 원래 동생이 공주라면 받아주는 게 예의 아닌가요? (현실 남매란… 후.)
사실 이곳은 궁전이 아니라, 스페인이 지은 요새였다.
네덜란드가 보수했고, 이후 명·청조, 일본, 영국, 미국의 영사관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공주의 궁전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만큼은! 오늘 하루 공주라는 걸로.
홍마오청을 지나 오르막길을 따라 걷다 보니, 진리대학이 나왔다.
조용히 캠퍼스를 거닐고,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푸른 녹음 아래 걷는 이 길이 너무 좋았다.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아쉬움이 더해졌다.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더 열심히 대만을 만끽해야지.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은 바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촬영지, 담강중학교였다.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예전 직장이 떠올랐다.
그곳은 내게 나쁜 기억이기도, 좋은 기억이기도 했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 아니었다면, 꽤 괜찮은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힘들고 아팠던 그 시간 속에도, 분명 아름다운 추억이 존재했다.
그 시절의 나를 돌아보니, 문득 나와 함께 했던 아이들에게 미안해졌다.
그 아이들에게 더 친절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괜히 마음이 쓰였다.
지금은 그저,
아이들이 더 행복하길 바라본다.
하교 시간.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삼삼오오 골목길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단수이의 자랑인, 아름다운 석양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부둣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
오늘 하루, 정말 많은 따뜻함을 받았다.
이 온기들이
내일도, 모레도, 그 이후의 나에게도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