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적 연대엔 관성적인 사람들만 모여든다
몇 달 전 회사의 큰 행사 하나를 마무리했다. 연례행사 같은 것인데 이번엔 특히 세션 하나의 섭외와 진행까지 맡아 꽤 손이 많이 갔다. 당일 행사에서 풍부한 이야깃거리가 나오게 하기 위해서 사전미팅을 가졌다. 경남에서도 흔쾌히 출연을 허락해 준 패널을 비롯해 서울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패널들까지 행사 전 한 자리에 미리 모여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일생일대 첫 MC(?) 데뷔라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 대본까지 만들었다. 먼저 흐름을 살피기 위해 한글문서로 하나, 그다음 진행을 위해 아이패드에서 보기 쉬운 가로형식의 PDF 버전 하나. 혹시나 나나 출연자들이 이야기하다 긴장해 중요한 포인트를 놓칠까 볼드(두꺼움) 표시와 컬러까지 입혀 꼼꼼히 표시해놨다. 어쨌든 진행은 실수 없이 시간까지 마쳐 잘 마무리 됐다. ‘진행에 소질이 있는 것 아니냐’는 아부성(?) 멘트까지 들었으니 개인적으론 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단 참여자가 많지 않았던 것이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다양한 청년들과 모임을 하고 있어서 내심 관객석에 그 친구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아무래도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과 시시콜콜한 회사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함께하면 긴장도 덜하고 나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에 행사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렸지만 아무래도 참여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무응답. 못내 시간을 조정하다 불참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어슬렁 형식적인 연대를 한다고 생각했던 조직의 구성원들은 짧게라도 얼굴을 내비치며 자리를 빛내주고 있던 상황이어서 못내 배가 아팠다. 결론은 내가 함께했으면 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행사에 오지 못했다. 흡, 뭐야아! 우리의 관계 이 정도였어?
잠깐 서운할 뻔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도 그들에게 연대하지 못했던 순간이 있었다. 아니 많았다. 지인 A의 조직에서 매년 꽤 큰 규모로 참석하는 행사가 2주 넘게 지방에서 열렸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참석하지 못했다. 음... 나머지 지인들의 중요한 행사는 파악조차 하지 못했으니 진짜 더 많을 듯? 아마 지인들도 표현은 못했겠지만 나만큼의 서운함을 느꼈겠다 싶어, 쌤쌤인 듯했다.
다시 생각의 방향을 돌려, 나와 그들은 왜 서로의 중요한 행사에 실질적으로 힘이 되게 응원해주지 못했을까. 일단 기본적으로 우리는 저렙들이라 힘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대부분 (뭔가 어설픈 가짜) 연대를 외치는 사람들은 최소 조직의 부서를 아우르는 장쯤이다.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게 그들의 일이다. 몇 시에 하든 장소가 어디든 그가 가고자 한다면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하고자 하면 갈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과 나 같은 사람이 감내해야 할 것의 차이는 좀 있다. 나 같은 사람은 고민하다가 무리해서 일을 쳐내고, 또는 눈물을 머금고 연차를 쓰거나, 행사에 다녀와서 야근을 하겠다는 결심을 한 뒤 참석한다. 연대소리꾼(?)들은 그게 일이니, 한 명의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것들과 비슷한 것을 버리면서 까지 행사에 참여하는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우리는 조직의 실무자나 좀 고렙이라고 해봐야 팀장급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오전 10시, 오후 2시~3시 시간에 실무를 버리고 서로의 행사에 행차해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심지어 티도 안 난다.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취재에서 느꼈던 경험도 떠올랐다. 이전에 청년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발표회에 취재차 참석한 적이 있었다. 해당 협동조합은 주부 조합원의 비율과 활동이 압도적으로 높은 조직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청년들은 수도 참여의 빈도도 낮았다. 그래서 ‘청년들은 MZ세대라 모임을 싫어하나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부분의 모임은 청년들이 노동을 할 2시에서 4시 사이에 이뤄졌기 때문에 청년들의 참여 자체를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청년들을 탓하기엔 꽤나 편협한 방식으로 모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꾸물꾸물한 생각의 통로를 지나고 보니, 연대를 할 때 ‘왜 이것도 못해줘’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해주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못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게 맞을 듯하다. 우리는 누구의 기준으로 연대의 모습을 빚어내고 있는 걸까. 우리가 처한 환경과 레벨과 품에 맞는 연대의 모습을 만들어 내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연대를 좀 더 튼튼히 해줄 수 있는 방법인 듯하다. 몇 주전쯤 문화재단에서 일하는 지니의 지인이 지니의 재직 2년을 기념하며 어여쁜 화분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꽤 멋진 연대인 듯하다. 나는 지인의 연례행사에 직접 행차하는 방법 말고, 어떤 신박한 방식으로 나만의 연대를 보여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