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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Aug 17. 2023

회피형 남편과 대화하는 법


어린 아이와 함께 하는 호캉스는 마냥 쉼이 아니다.

수영도 해야하지, 놀아도 줘야지, 아침 일찍 일어나 조식도 먹어야지 바쁘다.


지난 휴가 때, 저녁에 아이와 호텔 수영장에 다녀와 씻고 노곤노곤한 몸을 폭신한 침대에 눕혀 잠을 청하는데 남편이 뜬금없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최대한 대답도 해주고 호응도 해주었지만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직 기억에 남는 건...


'내 남편이 이렇게 말이 많았었나?'


대화를 듣는 내내 들었던 내 생각뿐.


당신 한국어가 많이 늘었어.


남편과 결혼하고 5년 정도 흘렀을 때, 내가 했던 말이다.


늘 물어보면 "모른다", "모르겠다", "내가 알바 아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던 남편. 그래서 물어보는 나의 말문을 턱 하니 막히게 했다. 


하지만 옹알이하던 아이가 말문이 트이듯, 그는 조금씩 말이 늘어갔고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 등을 말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물론, 감정이나 기분을 자세하게 말하는 건 조금 어렵긴 하다.)


남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생각, 신념, 판단이 말로써 정의되고 부부 사이에 공유되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졌고 우리 두 사람도 조금씩 같이 살기 편해졌다. 소통의 부재로 인해 겪어야했던 문제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 말이 많았고, 남편은 듣고 싶지 않아했다.

남편은 필요 이상으로 말이 없었고, 나는 답답했다.


이번 글에서는 회피형 남편과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내가 사용했던 방법을 나눠보고자 한다.




1. 회피형에게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불안형이나 혼란형(불안+회피형)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좋아한다. 애정표현도 잘하고, 문제가 생기면 대화로 풀어나가고 싶다.


"잠깐 앉아서 이야기하자."


대화를 나누자며 차와 다과를 식탁에 늘어뜨려놓고 준비한 아내.


하지만 회피형에게 이런 상황은 끔찍할 뿐이다.


벗어날 곳도 없이 자리에 마주앉아 꼼짝없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대화를 해야한다니! 회피형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무언가를 하면서 하는 대화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자며 마주 앉은 상황보다는 무언가를 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훨씬 마음이 편하다. 대화에서 막혔을 때, 여차하면 화제를 전환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강압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하지만 도망갈 수는 없는 그런 상황을 많이 이용했다.


주로, 미국에서 살 때 로드 트립을 하며 대화를 많이 했다. 짧게는 4시간 씩 운전을 했기 때문에 그 시간에 서로 듣고 싶은 노래를 듣기도 하고, 이런저런 추억 이야기도 했다. 나를 바라보며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뻥뚫린 고속도로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니 남편도 말이 술술 나왔다.


남편의 말은 톤이 평이하고 말 속도가 드리고 재미가 없지만, 어차피 4시간 동안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나도 자연스럽게 꼬리 질문을 하며 대화를 끌어갔다.


미국에서는 내가 남편과 아이의 머리를 잘라주었는데, 이 시간도 요긴하게 쓰였다. 아이를 재우고 거실에 나와 남편의 머리를 자르며 도란도란 이야기한다. 심각하고 무거운 이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대화가 나왔고, 도망갈 수는 없지만 딱히 강압적이지 않은 대화 분위기에 남편도 즐겁게 동참했다.



2. 함께 취미생활하기


남편도 취미생활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와 결혼하면서 많은 취미가 사라졌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나마 있던 취미가 모두 사라졌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의 취미는 <여행>이다. 


단지 그가 여행을 좋아해서, 그리고 나의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500만원 짜리 중고차를 끌고 미국 구석구석을 다녔던 우리.


하지만 그 여행이 우리 부부의 의사소통에 대한 실마리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톰 소여의 마을 한니발에서 먹어보는 허클베리 아이스크림.


시카고 건축투어 중


우리 부부의 공통점은 <잡학>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거나 맛있는 걸 먹거나 노는 것에는 큰 흥미가 없다. 대신 이런저런 잡학 습득에 큰 행복을 느낀다. 


함께 시카고건축협회에 회원 가입을 해서 1년 동안, 시카고 건축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다니기도 했고. 이런저런 박물관을 다니며 미국 역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경험하고 배운 내용들은 다음 여행에서 연결되고,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그렇게 여행을 준비하고, 또 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여행 이후에도 우리는 공통의 대화거리가 생겼다. 과거에 대한 후회, 서로에 대한 원망, 내가 가진 트라우마와 같은 부정적인 대화보다는 함께 만들었던 추억, 즐거운 경험 등 긍정적인 대화의 소재가 많이 늘어났다.


함께 취미생활을 하면서 좋은 점은 "무언가에 집중할 때" 회피형의 방어가 자연스럽게 낮아진다는 점이다. 함께 요리를 하거나, 등산을 하거나, 배우는 활동을 하면서 남편은 나에 대한 방어를 자연스럽게 낮출 수 있었다. 이 과정이 오랫동안 계속 반복되면서 점차 일방적이었던 대화가 쌍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3. 그가 말하고 싶은 걸 말하게 하기


남편이 아주 가끔 봇물 터지듯 말할 때가 있다. 요즘은 아예 내 말을 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기도 한다. 나는 그럴 때면 그의 이야기를 무조건 들어준다. 


이제는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나는 그럴 때면 그의 농담에 크게 웃어준다.


회피형이 편안해하는 주제로 계속 말하게 해야한다. 대부분 상대로서는 관심이 떨어지는 전문적인 지식이거나 어떤 사건의 나열, 혹은 지식 전달에 그치기 쉽긴 하다. 하지만 그런 주제라도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말할 수 있도록 계속 훈련해야한다.


계속 연습해야 나중에 꼭 해야할 말을 전달할 수 있고,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도 전달할 수 있다.


4. 대화보다는 문제 해결 방법 제시


회피형과의 갈등을 대화로 해결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저 서운한 것을 이야기하거나 감정을 토로해도 회피형은 이를 "공격"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자신이 해야할 일도 없는데 상대가 나를 "원망"하고, "비난"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회피형이라고 할지라도, 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다. 


회피형이 할줄 아는 일이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의지하려고 하는 상대탓으로 돌리거나 회피하는 것 뿐이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로 만족할 만한 방법을 도출하는 것은 어쩌면 회피형에게는 어려운 미션일 수 있다. 심지어 본인이 왜 이런 것들을 해야하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회피형과의 관계에서 힘든 일이 있다면, 그에게 감정을 호소하고 외치기 보다는 혼자 차분하게 방법을 찾아 제시하는 것이 낫다. 즉, 결론만 통보하라는 것.


나와 남편 사이에는 오랜 문제가 있었다.


대부분의 회피형들이 그러하듯, 그는 모든 애정 표현이나 선물 등을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했다. 커플링을 맞추고, 프로포즈를 하고, 비싼 돈을 지불하고 사진찍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타인부정-자기긍정인 회피형이 고집을 부리면 누구도 꺾을 수 없다. 회피형과 어떤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결국 회피형의 뜻에 모두 맞춰줄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뜻대로 결혼을 했고, 내 가슴에는 불타오르는 분노만 남았다. 그 분노는 작은 일에도 금방 건드려져 활화산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그는 외면하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했다. 그는 무척이나 자신의 지난 고집을 후회했지만 그때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금이라도 다이아 반지를 사줘, 프로포즈를 해줘, 사진을 찍어줘


나중에 이혼하더라도 다이아반지는 받고 이혼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던진 말이었다. 그만큼 억울했다.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했고,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회사에서 부여받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듯 내가 던진 프로젝트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검색을 하여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알아봤고, 아이와 내가 잠든 밤에 프로포즈 이벤트를 준비하고, 제주도에서 스냅 촬영을 하는 날에는 오픈 스포츠카까지 빌려왔다.


많이 늦었지만 아이와 함께였기에 오히려 더 뜻깊고 행복한 시간들이 되었다.


당신이 서운한 건 알았지만, 어떻게 해줘야할지 몰랐어.


나중에 남편이 한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문제 해결 방법이었다. 내가 아무리 화를 내고, 슬퍼해도 그는 무얼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5. 너무 화가 날 때는 떨어져있기


남편의 회피와 외면으로 힘든 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저찌 해결되었으니 지나가면 될 것 같지만 당시로서는 화가 너무 많이 났다.


진작 나서서 한 번 알아봐주거나 중재만 해줬어도 이렇게 오랫동안 고통받을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영문도 모른채 힘들었던 시간들이 억울했다.


그런데 그 직후, 남편이 장기로 출장을 갔다. 시차까지 바뀐 탓에 연락도 쉽지 않아 나는 남편없이 혼자 분노를 삭혔다.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가 다 사그라들었고 잊혀졌을 때, 남편이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평화로운 일상을 시작했다.


회피형 남편에게 화를 내는 것은 별 이득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화를 풀어주고 진정시켜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화를 내면 회피형 남편을 더 회피하게 혹은 더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조금 떨어져서 화가 가라앉으면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수 있다. 


대신, 내가 얼마나 속상하고 화가 났는지, 해결을 위해 어떻게 해주면 좋겠는지 예쁜 말로 알려주자.






이 글은 결코 회피형과의 연애나 결혼을 권장하거나 추천하는 것이 아니다. 결과론적으로 행복하니 장땡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애착유형에는 총 4가지가 있다. 안정형 애착과 불안정형 애착(불안형, 회피형, 혼란형). 그리고 이 4가지 애착유형의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연인이나 배우자는 "안정형"이다. "안정형"은 누구와 연애를 하건 상대에게 안정적 애착을 경험하게 해준다. 당신이 아직 싱글이라면, 당신이 만나야할 연인은 "안정형"이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불안정형 애착끼리 결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불안형 여자와 회피형 남자는 자석의 S극과 N극처럼 강하게 이끌리니 말이다!


단지, 서로 강한 동기를 가지고 피나는 노력을 한다면 완벽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그리고 지금보다는 훨씬더 안정적인 관계를 누구나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불안정 애착을 가지고 성인이 된 어른이를 위한

썸머의 클래스 101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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