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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Aug 17. 2023

회피형 남편과 살면서 좋은 점

나는뒤늦은 여름 휴가를 다녀오면서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서 한 생각이 들었다.


'회피형 남편과 살면서 좋은 점'을 한 번 써봐야겠다. 왜냐하면 단점은 너무 많이 언급했기 때문에 균형의 차원에서 좀 덧붙여보기로 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마치 '가난하지만 좋은점 -> 외식을 자주 못하니 엄마의 정성이 담긴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다', '비만이라서 좋은 점 -> 겨울에 덜 춥다' 처럼 말장난이나 정신승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장점이 회피형으로서의 장점이 아니라 그냥 내가 결혼한 남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일 수 있고, 다른 회피형들에게는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남편과 함께 살기로 결정했고, 회피형 배우자와 살기로 결심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내가 느끼는 장점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나의 남편이 회피형임에도 같이 살기로 결심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1. 그는 성공한 회피형이다.

정서적 교류나 공감 등에는 매우 서툴며, 기본적으로 타인을 신뢰하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BUT 사회생활이나 자신의 커리어를 쌓는데에는 문제가 없다. 관계나 정서적 부분에서는 회피하지만 일적인 영역에서는 회피하지 않는다.


2. 그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하며, 변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다.

이론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회피형이기 때문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상기시켜주고, 애착이론을 함께 공부하면서 남편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감정에 호소할 때는 '네가 너무 의존적이야', '너는 독립적이지 못해'라고 생각했지만 깨닫기 시작했고, 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럼, 한 번 장점을 정리해보겠다~








1.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한다.


남편은 언제나 내 곁에 존재한다. 다만 내가 원하는 만큼, 필요한 만큼 가까이 있지는 않고 한 발자국 떨어져 존재할 뿐이지만 말이다.


그 부분이 늘 서운하고 속상했다.


간절히 누군가의 도움과 개입, 위로가 필요한 날도 있지만, 그는 늘 한 발자국 떨어져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그를 싫어할 때도, 거부할 때도, 이별을 결심할 때도, 우울할 때도, 분노가 나를 감쌀 때에도... 그 때도 그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한 발자국 떨어진 그 자리에서 말이다.


그는 아주 조금씩 내게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나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는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부모의 집착과 방임에 익숙했던 나에게 그런 남편의 존재는 힘이 되어준다. 아주 가깝거나 외면했던 부모가 아니라 그래도 한두걸음 떨어진 곳에 늘 있어주는 남편이 정서적으로 훨씬 도움이 된다.


* 물론 친밀감을 유지하며, 자연스러운 공감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안정형이 훨씬 낫다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



2. 타인의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다.


성공적인 회피형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 노닥거리기보다는 본인의 취미나 자기계발에 열심인 것이 큰 이유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하고 싶다. 그들은 감정적인 소모가 적다. 타인의 감정에 덜 동요되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은 육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집에서 놀고 싶은데 마트 가기 싫은 아이. 1시간 동안 소리지르고 운 날.


왜냐하면 우리 아이는 감각이 예민하고, 불안하고, 완벽주의를 추구하고, 뜻한바를 반드시 이뤄야하고, 타협을 못하기 때문이다. 울고 떼쓰고 소리지르고 분노하기 일쑤였다.


꼬박 3년 동안,

10분 샤워를 위해, 매일 30분을 울고 소리질렀다.

3분 양치를 위해, 매일 20분을 울고 소리질렀다.

그리고도 자기 싫어 매일 안 잔다고 울고 소리질렀다.


(미분양 아파트에 살면서 아랫집, 옆집이 오랫동안 공실이어서 다행인 시간들.)


이렇게 고집쎈 아이지만 100일 만에 통잠을 자고, 3돌이 되는 생일 때 기저귀를 떼고, 6세에는 한글을 뗐다.


모두 남편이 이룬 업적들이다.


남편은 아이의 감정에 동요되지 않았고, 해야할 일을 하게 했다. 지금도 아이의 육아와 학습은 전적으로 남편이 담당한다. 철저한 보상 체계를 도입하고, 규칙에 맞게 아이를 끌어간다.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면서, 아이는 엄마보다 "아빠" 소리를 더 많이 하고, 아빠를 더 좋아하고 따른다. 아빠와 함께 게임을 하며 노는 것도 아이가 무척 기다리는 시간.


* 물론 애정표현은 별로 없다. 아이에게 동요를 불러주고, 뽀뽀를 해주고, 껴안고, 둥가둥가하는 건 나의 몫이지만 아이가 점점 커가면서 내 역할은 더 줄어든다.


3. 감정 과잉을 멈추게 도와주다


나는 감정에 과잉된 상태로 살아왔다. 


나의 책 <나는 왜 엄마가 힘들까>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감정이 과잉된 엄마에게 양육되었다. 나의 엄마는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끝없이 불안과 분노, 슬픔, 억울함을 표출했고 위로받기를 원했다. 감정의 바운더리(boundaries, 경계선)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과잉된 엄마의 감정에 수시로 함께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녀를 끝없이 위로해주고, 넋두리를 들어주고, 분노를 대신 삼켜주었다. 그것이 사랑이고, 가족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그렇게 슬플 일이야? 이제 그만 좀 해.


회피형은 충격적인 일에도 놀라울 정도로 덤덤하다. 본인엑 벌어진 일임에도 마치 남에게 벌어진 일처럼 반응한다.


이런 남편의 반응은 감정 과잉과 자기 연민에 과도하게 빠져 출구를 찾지 못하고 그 안에서 무한정 헤매고 있는 내게 멈춰야할 지점을 알려주었다. 나는 남편을 통해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돌뿌리에 걸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 다만, 힘든 순간 적절한 위로와 위안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4.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회피형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인생은 혼자 사는 것." "나는 나만 믿는다."가 그들의 신조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스트레스나 고통, 슬픔, 후회 같은 감정을 타인에게 쏟아붓지 않는다. 즉, 타인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지 않는다는 소리다.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 등을 가정으로 가지고 오지 않는다는 큰 장점이 있다.


* 물론, 자신에게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공감해주지 못한다. 또한 너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아 오는 부작용이 있다.


얼마 전, 남편의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스트레스로 인해 역류성 식도염부터 이런저런 문제가 있는 듯 했다.


그 결과를 듣고 나는 아이와 대화를 통해, 여러 스케줄을 조정하기로 했다. (아들의 교육과 육아, 훈육은 주로 남편이 맡고 있다. 아들 기가 너무 쎄서 엄마가 감당 안되는 상황.) 오는 9월부터 남편은 퇴근 후, 헬스장을 다니며 운동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고, 그 때까지는 내가 아이와 함께 밥을 먹으며 TV 보는 시간을 갖기로 한 것.


사실 그 전까지 남편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알지 못했다. 자신에게 있었던 힘든 일을 말하지 않고, 특히 자신의 감정을 정의해서 말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위에 도움을 청하기도 어려워 건강을 망치는 경우도 많다.











물론, 회피형 남편과 오래 살다보니

나도 점점 부부 관계가 사무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무미건조해진다고나 할까?


하지만 우리는 중간 지점을 찾았다.

나는 남편과 되도록이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정서적으로 과한 요구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서운한 마음이 든다면 따지고 다투기보다 의식적으로 조금 거리를 두며 회복한다.


회피형이 완벽한 안정형으로 갈 수는 없다.

그리고 혼란형(불안+회피형)인 나 또한 완벽한 안정형으로 갈 수는 없다.

(참고 : 나는 왜 사랑할수록 불안해질까(2022))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가?

어차피 이 세상에 완벽한 안정형은 흔치 않으니 말이다.

자신이 안정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조금의 회피나 불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불안정 애착을 가지고 성인이 된 어른이를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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