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가장한 필연

세렌디피티(Serendipity)

by 조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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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하루를 더 연장했다. 워싱턴으로 가는 시간을 보다 여유있게 잡기 위해 하루 더 머물거라고 직원분께 말했다. 그런데 연세가 지긋한 분이셨다. 연세있으신 분이 직접 고객을 대응하며 서비스 직종에서 근무를 하고 계신다는 점이 신선했고, 배울만한 문화라고 생각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빠르지 않은 속도로 명료한 발음을 구사하시는 면모에서 내가 외국인이라서 배려해주는 것을 느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문화의 충격까지는 아니었지만. 문화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모든 분야에서 고용되는 연령에 제한이 없어지는 추세가 사회에 도입된지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뉴욕의 이미지는 낭만적이다. 로맨스 쟝르에서 주요 인물들이 만나는 공간이고, 그들의 생활배경에서 등장하는 거리에서 활기찬 에너지를 가지고, 한 손에는 커피가 들려있어야 할 것 같고,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바람을 가로지르는 모습으로 위풍당당하게 걸어가야 할 것 같다. 추운 겨울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던 날,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거리를 걸을 때 마셨던 코코아의 향과 맛은 지금도 여전히 최고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 달콤한 향과 맛이 이국에서의 추위를 한 순간 포근한 기운을 느끼도록 변화시켜놓았으니 마술의 힘이 작용했었던 것 같다. 그 힘에 이끌려 뉴욕에서의 시간을 다시 펼쳐보며 <세렌디피티(Serendipity)>를 생각해본다.


조나단[Jonathan, 존 쿠삭(John Cusack)]과 사라[Sara, 케이트 베킨세일(Kate Beckinsale)]는 크리스마스 시즌 뉴욕에 있는 한 백화점에서 장갑을 사려다가 우연히 같은 장갑을 선택하면서 만난다. 이를 계기로, 세렌디피티에서 디저트를 함께 먹으며 이야기까지 나누게 된다. 조나단과 사라는 놓고 간 물건을 되찾기 위해 왔다가 재회하면서 그들의 반복된 우연에 대한 의미를 찾기로 한다. 5달러 지폐와 노점가게 판매대에서 구입한 책에 조나단과 사라의 전화번호를 적고 상대의 전화번호가 적힌 물건을 갖게 될 때 서로에게 연락하기로 한다.


조나단과 사라가 선택한 지폐와 책은 그들의 만남이 우연인지 아니면 운명인지를 결정하게 하는 장치이다. 이 장치가 이들의 생활에서 어떻게 작용하여 이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지를 알려주면서 운명의 힘이 환경을 지배할 수 있는 가치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조나단과 사라의 결정은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가 보지 못한 길(The Road Not Taken)”에서 처럼, 선택되어야 할 것 같은, 평범하지 않은 과감한 선택이다.


몇 년 후, 조나단과 사라는 각자의 결혼이 임박해서 다시 만나기를 갈망하며 서로를 찾게 된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재회한 조나단과 사라는 처음 만났던 뉴욕에서 그들의 만남이 필연적 운명이라는 것을 마침내 증명해낸다. 완전한 우연으로부터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세렌디피티'의 의미처럼 조나단과 사라는 운명의 장치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거부할 수 없는 환경에 굴복하여 일어난 우연이 아니라 우연처럼 다가온 필연을 운명의 장치를 통해 확인한 것이다.


인류는 팍팍한 현실의 삶에서 희망적으로 살아내야만 한다고 생각해왔다. 우연이 찾아와주기 바라며 희망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의지가 동반된 우연이 만들어낸 희망이 더 멋진 희망의 색깔을 발현할 거라고 굳은 의지로 믿기도 한다. 그런데, 냉철하게 마주봐야하는 현실에서 그토록 갈망하는 희망을 실현하고자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발현시킬 장치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실현된 희망을 마주하는 시간을 조우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간절히 바라는 희망을 만들어가는 여정에 참여하려 한다면 기회는 내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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