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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이 May 04. 2024

20년만의 대학 리포트 1

20년 전 보단 낫겠지

이 글은 다시 한번 대학생이 된 내가...

리포트의 늪에서 허덕이며 써낸 첫 번째 리포트다.

리포트 이제 4개 더 남았다. ^^

신난다... ^^


글에서 강조하던 삶의 자율성 말인데, 내가 요즘 그걸 찾아가고 있다.

어떻게?


'출근길에 전혀 안 가봤던 길로 삥 돌아가기.'

그래서 10-15분 걸리는 출근 길이 40-50분이 걸리기도 한다.


저게 또 은근 괜찮은 방법이다. 출근하는 아니라 어디 놀러 가는 것 같거덩.

내 삶에 큰 변화는 없지만 스스로 작은 변화를 일으켜서 약간 리프레쉬가 되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


쓰고 보니 슬프구나 또.

리포트는 리포트일뿐...


다음주부터 또 나는 수업의 늪.

그것도 내 선택(어쩔수없던, 하지만 반드시 잘 해낼)이었으니 슬프지만 나름의 자율성이라 생각해본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의 욕구와 가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무엇을 먹을지, 어떤 일을 할지, 누구와 함께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자 권리이며, 이는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해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자율성이 종종 너무도 당연히 무시되거나 희생되곤 한다. 현대 의학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 자체에는 꽤 성공적이나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것’에는 실패했다. 왜냐하면, 의학은 환자의 ‘치료’라는 명목하에 거의 강제적으로 환자가 ‘선택’하게 하며 환자들 또한 상대적으로 의학지식이 부족한 ‘을’의 입장이 되어 자기 삶의 질과 욕구보다는 의료적 판단에 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2018년 1월, 암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셨다. 그리고 나는 꽤 오랫동안 박카스를 마시지 못했었다. 아버지가 암 투병하실 때 병실에서 냉장고 안에 있는 박카스를 딱 한 모금만 마시고 싶다고 하셨지만, 나는 매몰차게 거절한 후 너무도 무심하게 그 앞에서 박카스를 꿀꺽꿀꺽 마셔버렸고 그 순간이 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죄책감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후로 한 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의료진이 허락해 주지 않은 그 ‘박카스 한 모금’이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을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존엄한 죽음은 당연히 비단 박카스의 문제는 아니다. '치료 효과'에만 치중한 의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결코 지킬 수 없다. 인간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상태여도 심장이 뛰고, 기타 장기들을 억지로 기능을 하게 만들어 두었다면 사실상 그들의 임무는 성공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며, 자율성을 잃은 채로 삶을 지속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우리 자신의 삶을 존중받고, 우리 자신의 의지로 살고 싶어 한다. 의학의 역할은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삶의 마지막 단계들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살고 싶어. 그런데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라고 하셨다. ‘이렇게’라는 말은 그 당시 자신의 무력한 상황과 반복되는 끔찍한 경험에 대한 불만과 절망이었다.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상태에서 유동식만을 섭취하고, 배에는 장루가 달려있고, 극심한 고통에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해야만 했다. 위암 수술 중, 의료진의 선택으로 위장 전체를 절제하게 되었고, 몇 달 뒤 암이 직장으로 전이되어 다시 수술하게 되었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아버지는 자율성을 잃은 채로 마지막 2개월을 보내게 되었다. 아마도, 화학치료나 수술 등을 하지 않으셨더라면 암세포는 더 퍼졌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평소 좋아하시던 국수와 만두, 막걸리를 더 드실 수 있었을 거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에 머무는 시간이 더 짧았더라도, 더 행복하긴 했을 것 같다. 아버지는 연명치료를 거부하셨고, 병실 안의 이름 모를 기계 소리와 함께 조용히 떠나셨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아버지가 자율성을 되찾고 자유롭게 떠난 것처럼 느껴져 눈물이 나지 않았다.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아툴 가완디)"를 읽으면서, 그리고 아버지의 투병 생활을 떠올리며 나는 존엄한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첫째, 나는 내가 살았던 곳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어떤 환경이라도, 입원실이나 요양원보다는 내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내 집에서 조용히 떠나고 싶다. 둘째, 온갖 화학요법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암은 결국에는 심각하지 않은 만성 질환으로 여겨질 것이라 한다. 나는 나의 인생의 마지막을 신체적인 무력감과 사고의 자율성을 잃은 채로 연명하고 싶지 않다. 셋째, 뇌가 기능하고,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한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하는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내게 의미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싶다. 이는 나 자신을 위한 존엄한 죽음을 위한 실천이 될 것이다.

   존엄한 죽음, 그리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다 보니 내게 떠오르는 하나의 질문은 바로 이거다. ‘그렇다면, 당장 죽음이 임박한 것 같지 않은 지금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인간이 끝까지 놓고 싶지 않아 하는 그 위대한 ‘자율성’을 나는 현재 멀쩡히 살아가면서도 가끔은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는가?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진정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내게 의미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있는가? 그 집중을 삶의 마지막 순간으로 미룰 필요가 있는가? 이 글을 쓰면서 어디선가 읽었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해답이 보인다는 글이 이제야 완벽히 이해가 된다. 존엄한 죽음이 갑자기 준비될 것 같지 않다. 당장 지금부터 나는 자율성을 가지고, 나에게 중요한 것에 집중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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