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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Aug 03. 2023

아무리, 섬에 있는 섬이 보이는 도서관이라도

이 더위는 못 이겨


 

고개를 숙이면 박민규의 <<핑퐁>>이 있다.

“자신의 라켓을 가진다는 건 말이다, 말하자면 비로소 자신의 의견을 가진 것이란 얘기야.”


고개를 들면 네모 창 트인 풍경 끝에 바다와 섬이 있다. 집에서 걸어 15분이면 갈 수 있는 ‘섬에 있는, 섬이 보이는 도서관’이다. 진짜 이름은 ‘서귀포시 동부 도서관’이다.


제목만 읽어도 막 흥분되면서 본능적으로 클릭을 유발하는 낚시 기사는 못 될망정. 기미 걱정도 잊고 창밖을 한없이 바라보게 할 풍경이 있을 거라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이름이여라. 오늘도 길 찾느라 열일하는 오직 내비게이션에만 최적화된 네이밍! 아 근데 이름이 뭐가 중요하냐? 도서관에 누가 경치 보러 가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걸어 15분이라면 운동 삼아 다니기 딱 좋다. 너 말라죽어봐라 내리쬐는 땡볕이 없으면. 후끈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없으면. 길가에 우거진 잡초가 없으면. 묶이지 않은 큰 개가 컹컹 짖지만 않으면.


꼬마적 엄마 심부름으로 비석거리에 다녀와야 할 때 사나운 개를 키우는 집 앞을 지나가야 했다. 제주도는 대문도 없는데 개를 마당에 풀어 키우는 집이 많았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개가 나타날까 조그만 심장이 쪼그라들어 딱 멈출 것만 같았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컹컹 짖으며 다가오는 개에게 담벼락까지 몰려 ‘엄마’를 외치며 숨죽여 울었던 공포의 기억이.


담벼락 기억은 이런거 아니냐고.


뛰어 도망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개를 쫓아 줄 어른이 나타날 때까지 꼼짝없이 울며 서 있었다(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 차릴 아이였군). 꼬마야, 울지 마.


엄마, 누가 그래쪄? 말만 해.


우리 하루를 키우며 개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사라졌다. 낯선 개를 만나면 손 등을 주어 먼저 냄새를 맡게 한다. 천천히 내 냄새를 나눠주고 쓰담쓰담 해주면 이제 우리는 서로 아는 사이다. 나 이제 이렇게 개랑도 인사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낯선 개가 무턱대고 컹컹대는 건 무섭다.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 잡초가 들쑥 날쑥한 인도 옆으로 자동차가 쌩쌩 스쳐간다(나도 육지 집에 차 있는데...). 개가 컹컹댄다(나도 육지 집에 개 있는데…). 고향 제주도에는 내 것이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 걸어간다.


해가 뒤통수를 따갑게 후려친다. 후끈한 바람은 앞에서 싸다구를 날린다. 양산으로 해를 가려야 할까? 바람을 가려야 할까? 아님 집어치워야 할까? 뒤통수냐, 싸다구냐. 해가 바람을 이긴 건 지나가는 나그네일 때고. 해를 가려보려고 양산을 뒤로 넘기는 순간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양산 살이 훌러덩 뒤집힐 거다. 그렇게까지 불쌍한 장면이 연출된다면 다 포기하고 주저앉아 울 수도 있다.


땀을 식혀주지도 못하는 뜨끈한 바람이 겁나 짜증 난다. 제주도 바람이 부리는 몽리(고집)는 양산도, 해님도, 용감한 꼬마였던 어른도 당해낼 수 없다. 양산 속을 시원한 욕으로 아롱아롱 장식하며 추진력을 조금씩 얻는다.


공포와 의문과 땀과 욕에 범벅된, 책을 사랑하는 인간이 집에 도착했다. 섬이 보이든, 산이 보이든, 다시는 걸어서 도서관 안 간다는 결심도 따라 도착했다. 엄마가 차로 데려다주면 한 번쯤 더 가볼까 하는 가능성은 살짝 남겨두기로 했다.


노을은 내가 갖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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