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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 Oct 24. 2021

07 오레오(1)

치즈들의 마을에 삼색이의 등장이라

 나라고 처음부터 오레오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오레오는 2018년 9월 18일, 처음으로 기숙사에 데뷔했다. 오레오라는 이름도 처음 글을 올린 사람이 지어주었다. 모두들 그러려니 '오레오'라고 불렀다. 오레오는 기숙사 로비 쪽은 기존의 치즈 냥이들이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처음 나타났던 흡연장과 자전거 보관소 쪽에 머물렀다. 갓 독립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작은 아기 고양이는 매우 사납고 앙칼진 성격이어서 귀여움이 폭발하는 미모만 보고 다가갔던 기숙사생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오레오는 마른 몸매에 호리호리 길쭉한 팔다리를 가졌다. 치즈 뚱냥이들만 보던 기숙사생들이 보기에는 안쓰러워 챙겨주고 싶었을 것이다. 많은 인간들의 호의를 등에 업은 오레오는 기세 등등 자리를 잡았다. 


 레오는 태생부터 도도하고 독립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야옹이라는 울음소리 대신 하악질로만 의사소통했고, 인간에게 골골 송이나 비비적거리는 것은 언감생심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가까이 다가갔다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에 피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모습마저 귀엽게 봐주고, 레오의 습성을 파악한 후로는 멀리서 예뻐했던 것 같다.


 이렇게 앙칼진 오레오가 보기에 야생성을 잃은 치즈 삼촌들은 한심하게 느껴졌을까, 만만한 부하처럼 보였을까? 그도 아니면 터줏대감들의 기선을 제압해서 자신의 자리도 하나 만들고 싶었을까? 이유가 어찌 되었건 레오는 크림·치즈·프레즐이 보이면 사납게 하악질을 해댔다. 크림이는 어마 뜨거라 도망갔으며, 프레즐은 레오에게 흥미를 보였다. 그리고 치즈는 언제나처럼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반응해주지 않고 똑같이 점잖게 앉아있을 뿐이었다. 


 오레오는 아침저녁으로 밥을 챙겨주는 집사가 있는 기숙사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자신의 구역에서 몸을 감추고 있다가도 밥 소리만 나면 슬그머니 와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도 밥….'


 당당한 척하는 얼굴 뒤에 간절한 눈빛을 본 나는 레오에게도 밥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예의를 아는 K-고양이라서 맨 마지막에 있는 자신의 밥 차례를 기다릴 줄 알았다. 하지만 가끔은 먼저 밥을 받은 크림이나 프레즐에게 하악질을 해 쫓아내고 자신이 먹기도 했고, 집사의 손을 세게 깨물고 빼앗아 가기도 했다. 


 나는 고양이라면 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은연중에 '크림·치즈·프레즐까지가 내가 돌보는 고양이'하고 마음속에 울타리를 쳐두었던 건지 내가 아끼는 고양이들을 괴롭히는 레오가 조금 얄미웠다. 한편으로는 '쟤도 살아남으려고 저러는 걸 텐데.'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측은지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때면, 레오가 깨문다던가 할퀸다던가 크림이와 프레즐을 때린다던가 하면서 한 번씩 미운 짓을 하고 갔다. 그래서 내게 오레오는 대체로 얄미운 축이었다. 




잔뜩 긴장한 마징가 귀



차례대로 가필드, 오레오, 크림, 프레즐, 크림



 레오가 처음부터 예의를 아는 K-고양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초반에는 자신이 등장했다는 인사 대신 하악질을 했고, 크림이와 프레즐의 밥을 넘보며 하악질을 했다. 참다못한 치즈가 레오에게 달려들어 몇 번 교육시킬 정도였다. 처음에 치즈가 달려들고 레오가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것을 본 후로는 '그 점잖은 치즈가?!'하고 놀랐다가, '그래, 레오가 얼마나 예의 없이 굴었으면 치즈가 저랬겠어. 치즈도 자기 패밀리는 지키는 대장 고양이였구나.'하고 치즈가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가, '그래도 레오는 아직 어린 고양이인데…. 애가 당차기는 해도 너무 혼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내 동정심이 치솟았다.


 이렇게 양가감정에 혼란스러워하며 '허허, 네 말이 다 맞다.', '그래, 네 말도 다 옳다.' 하는 황희 정승 놀이를 하는 동안 레오는 차차 고양이들 사이의 예의, 그리고 인간사회에 녹아들기 위한 기본적인 눈치를 배울 수 있었다. 오레오, 눈치 챙겨!




비오는 날, 오레오



 레오는 요령이 없었다. 기숙사 마스터인 크림치즈프레즐은 비가 오면 명당자리를 쏙쏙 골라 앉았지만(그래도 비는 다 들이쳤다), 레오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깜짝 놀라 자신의 구역에서 벗어나 긴장감에 벌벌 떨면서도 비를 피하겠다고 로비 구석에 앉아있었다. 그런데도 사람은 믿지 못하겠는지 한층 더 예민해진 눈초리로 흠뻑 젖은 털을 닦아주겠다는 손길을 한사코 거부했다. 하다못해 수건을 깔아주려고 해도 불안해했다. 바람이 세차 추운 날인데도 그랬다. 결국 멀찍이서 페이퍼 타월만 간신히 덮어주었던 날이다. 




자신의 구역에서, 오레오. (뒷다리에는 시커먼 진흙을 잔뜩 묻히고)



 레오와 나는 천천히 신뢰를 쌓아갔다. 우유와 크림이는 겁이 많았을 뿐 사람을 좋아했는데, 오레오는 인간을 전혀 믿지 않는 성격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 두 배의 거리만큼 뒤로 물러나고, 조금이라도 부담스러우면 바로 자리를 피해버렸다. 하악질과 냥냥 펀치는 기본, 한 마디로 야생의 고양이 그 자체였다. 


 하지만 매일 밥을 주는 집사의 얼굴 정도는 익혀둔 건지, 가끔은 다가가도 예의주시만 할 뿐 가만히 누워있거나 그루밍을 하기도 했다. 드물게 레오가 먼저 다가와주기도 했다. 주로 기분 좋은 밤이었다. 때론 낮이었다. 그런 식으로 레오는 아주 천천히 마음을 열고 있었다.




"어.. 왔냐?"



 사실 길고양이가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좋지 않다. 경계심이 없어지고 순화된 만큼,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에게 노출될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적정한 선의 경계가 생존에 도움이 되는 각박한 세상에서 레오의 순화가 이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레오가 기숙사를 선택한 순간부터 가필드처럼 극도로 조심성 많은 성격이 아닌 이상에야 순화가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어느 날 밤은 친구들과 야식을 먹고 올라오는데 레오가 따라붙어 쫄래쫄래 쫓아오기도 했다. 나를 알아본 것인지, 그냥 기숙사생이 뻔한 무리를 따라간 것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이제 오레오의 성격이 많이 누그러졌다는 것이다.




 또 어느 날은 볕 좋은 휴무였다. 아이들에게 오전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나왔는데 다른 고양이들은 놀러 나갔는지 숨어서 자는지 보이지 않고, 레오만 떡하니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연히 밥을 줄거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닭가슴살을 까주었다. 오레오는 내가 포장을 벗기고 작게 찢어주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닭가슴살을 통째로 물고 갔다.



 흙먼지와 마른 낙엽 위에 굴려가며 닭가슴살을 먹은 오레오가 더 달라고 다가왔다. 그런 식으로 두 개쯤 더 먹고 나서야 레오는 만족한 얼굴로 그루밍을 했다. 마지막 식사는 내가 조금 잘라주는 데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렇게 유독 기억에 남는 날들이 있다. 지나고 보면 그런 날 이후에 레오와 내가 더 친해졌던 것 같다. 특이하게도 오레오는 서서히 마음을 여는 것보다는 단계적으로 마음을 연다고 느꼈다.









가을볕의 오레오


 날씨 좋은 가을은 고양이들에게도 즐거운 날씨였다. 따스한 햇볕과 선선한 바람, 핼러윈 시즌 준비로 들뜬 분위기까지. 오레오는 그동안 천천히 녹아들며 기숙사 고양이의 일원이 되었다. 더 이상 하악질도 하지 않았다. 약간 겉도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레오니까 그러려니 했다. 유달리 똑똑하고 영민한 고양이였다. 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거니 싶었다. 다른 고양이들처럼 애교를 부리진 않았지만, 어느새 존재 자체로도 사랑스러운 내 새끼가 되었다.




  잔인한 계절 겨울이 찾아왔다. 거듭 강조하지만 기숙사가 위치한 용인의 겨울은 굉장히 추웠다. 허벅지까지 쌓이는 폭설이 내리기도 했고, 거친 바람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듯 매서웠다. 겨울 집이라도 놓아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기숙사 측에서 정해놓은 한계에 벗어나 그러지 못했다.


 대신 시간이 나는 대로 내려가 고양이들을 껴안아주었다. 사람을 꺼려하던 레오도 추위에는 이기지 못하고 무릎 냥이가 되었다. 나는 담요를 들고 다니며 고양이들을 담요로 한번, 내 패딩으로 한번 더 감싸주었다. 그렇게 안고 나면 그때부터는 시간싸움이다. 고양이들이 최대한 오래, 그리고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쥐가 나도 자세를 바꾸는 것을 자제해가며 인간 이글루처럼 무조건 가만히 버텼다.


 오레오는 그때도 약간 무서운 고양이었다. 인간이 기숙사로 들어갈 시간이 되면 다른 고양이들은 아쉬워하면서도 내려갔지만, 오레오는 인간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면 바로 깨물거나 발톱을 세워 꾹 눌렀다. 자긴 이대로가 좋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다. 




끔찍한 추위에 벗어주지도 않은 패딩 속으로 파고든 오레오


 


 


단짝 친구



 우유에게도 치근덕 댔던 바 있는 프레즐.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듯 이번에는 젠틀하게 다가갔다. 낯선 곳에 정착하려는데 살갑게 다가와주는 프레즐이 오레오도 싫지 않았던 모양이다. 둘은 금세 친한 사이가 되었고, 특히나 프레즐이 레오에게 가볍게 집착했다. 오레오는 독립적으로 혼자서도 잘 돌아다녔지만, 프레즐은 꼭 레오만 쫓아가려고 했다. 



꼬질한 단짝 친구


 햇빛 좋은 날도, 바람 부는 날도, 눈 내리고 추운 날까지도. 간혹 레오가 혼자 있고 싶어 할 때를 제외하면 둘은 언제나 함께였다. 인간이 보기에도 대단한 우정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오레오는 코리안 숏헤어 중에서도 흰색, 검은색, 노란색의 세 가지 색이 섞인 삼색이다. 삼색 고양이는 대부분 암컷이며, 0.01% 확률로 극히 드문 수컷이 태어나는데 이 수컷에게는 번식능력이 없다고 한다. 프레즐 임신소동으로 고양이 성별 구분하는 법을 자세히 배워둔 내가 보기에도 오레오는 암컷이 맞았다.




 레오가 임신했다. 레오는 많이 아팠다. 내가 퇴사한 후였다. 





-오레오(2)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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