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이었다. 짙은 갈색 몸체 양쪽에 금빛 촛대가 달려 있는 고풍스러운 피아노. 다리 윗부분은 달팽이 집처럼 나선형으로 휘감겼고 아랫부분은 달팽이 머리 같았다. 피아노의 다리는 그러니까 기어가는 달팽이 모양이었다.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으나 아빠가 나 몰래 준비한 피아노. 초등학교 졸업 선물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큰 선물을 받았다.
공무원인 아빠는 내가 일곱 살 때 농부가 되었는데 손가락이 가늘고 길어 피아노를 치면 근사할 것 같은 손을 가졌다. 고운 손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을 테지만 나를 학원 피아노 앞에 앉혔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방학 때, 아빠의 권유로 피아노 건반을 처음 두드려 보았다.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 아빠는 내가 집에서 피아노 치는 모습을 끝내 보지 못했다. 11월에 아빠가 골라 둔 피아노를 오빠의 고입 시험이 끝난 12월에 들여놓았다. 아빠 없는 집에. 오빠의 입시가 끝나기도 전에 피아노를 들여놓으면 내가 뚱땅거리는 바람에 오빠에게 방해가 될까봐 피아노는 그때까지 예약 상태로 영창피아노사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졸업 선물이라면 2월에 사줘도 될 텐데, 왜 11월에 피아노를 예약해 두었을까, 죽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것일까. 늦가을 6학년 수학여행 마지막 날, 가족에게 줄 선물을 사면서 아빠 선물로 뭐가 좋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사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그날 밤 아빠가 죽었다. 심장마비로. 마흔네 살의 아빠가.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온 지 며칠 되지 않은 날. 살을 맞았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울부짖는 엄마 목소리가 비몽사몽간에 들렸다. 새벽에 이웃집 차를 얻어 타고 아빠는 응급실로 실려 갔다. 갑작스런 소식을 듣고 우리집으로 달려온 동네 할머니가 아빠 목 뒤에 피를 좀 낼 걸 하며 안타까워했다. 우리 할머니는 넋이 나가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안방에 놓인 전화기 곁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읍내 병원에서 근무한 고종사촌 언니였다. 언니는 냉정한 목소리로 부음을 전했다. “아빠 돌아가셨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리에서, 가슴에서 일어난 반응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이,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다.
피아노 학원에 다닐 때 아빠는 매일 나를 데리러 버스 정류장으로 나왔다. 오토바이 옆에 서 있다가 내가 버스에서 내리면 빙그레 웃으며 다가와 손을 잡았다. 오토바이를 세워 둔 곳까지는 몇 걸음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빠와 손을 잡고 걷는 순간이 좋았다. 허리를 안고 달릴 때 아빠 목뒤의 사마귀를 보았다. 나도 목뒤에 사마귀가 있는데, 아빠의 사마귀를 보면서 나는 아빠 딸 맞구나 생각했다. 남이 볼까 감추고 싶은 내 사마귀를 예뻐하게 되었다.
아빠 등에 기대어 달리던 논길. 아빠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그 길을 달리는 게 좋아 피아노 학원에 빠진 적이 없었다. 생인손을 앓는 날도 피아노를 치러 갔다.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건드릴 때마다 아리지만 참을 수 있었다. 아빠는 나를 안쓰러워하면서도 내 의지력을 가상하게 여겼다. 나를 안고 수염이 삐죽삐죽 난 얼굴을 여린 볼에 비비곤 했다. 잘 표현하지 않는 아빠의 사랑을 나는 느꼈다.
학부모 대표를 맡은 명랑한 엄마와 달리 점잖은 아빠는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든든한 배경이었다. 교장선생님은 나를 볼 때면 아빠의 안부를 물었고, 남자 선생님은 학교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우리집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아빠를 만나러 왔다. 엄마와 아빠 덕에 나는 부러운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아빠가 부재하는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중학교 1학년 종례 시간. 담임선생님은 가정 환경 조사를 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사람 손 드세요.” 아빠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서슴없이 손을 들었다. 그때 바로 뒤에 앉은 친구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출신 초등학교는 달라도 같은 피아노 학원에 다녔기 때문에 우리는 중학교에서 한 반이 되기 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친구가 내지른 탄성이 내 어디를 친 것일까. 나는 책상 위로 고꾸라졌다. 친구의 탄성보다 더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아빠를 잃은 슬픔 때문만이 아니었다. 내가 남 보기에 놀라울 정도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기 때문. 느닷없이 반 아이들에게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에 충격을 받았다.
갑자기 친구들의 시선이 너무 낯설었다. ‘그렇게 불쌍하게 보면 안 돼. 난 행복하게 살아.’ 청소 시간에 창문을 닦다가 마주보는 누구에게 말을 했던가, 하지 않았던가. 분명한 것은 내가 손을 들었을 때 일어난 그 일이 내게 깊은 자국을 남겼다는 사실. 그 후 어떤 경우에도 손을 들지 않았으니. 주목받고 싶지 않아서. 시선이 내게 쏠릴 때면 마비되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전까지만 해도 남들의 시선을 즐겼다. 전학년이 한 반밖에 없는 시골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남 앞에 서는 일로 주목을 받을 기회가 많았다. 어디서든 나를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중학교에 입학한 날, 아름답고 매력적인 담임선생님에게 호기심이 생겨 손을 들고 사적인 질문을 했다. 내 의사를 표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순간에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수업 시간에 일어나서 책을 읽는 것조차 두려웠다. 도덕 선생님은 호명하여 책을 읽게 했는데 그때마다 내 이름을 부를까봐 조마조마했다. 음악 시간에 반 아이들 앞에서 노래 부르기 시험을 볼 때는 아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남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커트를 하러 미용실에 갔을 때, 이웃 동네에 사는 한 아주머니는 내가 있는 데서 우리 집안 소문을 미용사에게 옮겼다. 아빠가 죽던 날, 방문에 발라 놓은 종이를 다 찢어 놓을 만치 답답해했는데 식구들이 몰랐다고. 황당한 말을 듣고도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 집 방문은 종이를 바르는 문이 아닌데요.’ 진실을 말하고 싶었으나 말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아빠라는 단어는 금기어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친구와 대화할 때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죽은 사람이 불쌍하지요.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남편을 잃은 엄마가 조문하러 온 사람들에게 한 말을 기억한다. 그때 마흔인 엄마가 어떻게 그리 의연할 수가 있었는지. 돌연 남편을 잃고 시부모와 자식 셋을 건사하며 살아가는 엄마가 슬퍼할까봐 나는 엄마 앞에서 아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빠가 없어서 서러운 날도, 아빠한테 자랑하고 싶은 날도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 그 길을 혼자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아빠의 눈인 것 같아서. 집에 들어서면 창문을 열었다. 하늘을 방 안에 들이기 위하여. 하늘을 모시고 ‘엘리제를 위하여.’ 베토벤이 사모하는 여인을 그리워하며 작곡한 곡을 사모하는 아빠를 위해 연주했다. 아니, 나를 위한 연주였는지 모른다. 마음이 무너지는 나를.
중학교 2학년이 끝날 무렵, 아빠를 마음에서 떠나보냈던 것일까. 나는 피아노와 결별했다. “너는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 장차 무엇이 될지 모르니, 피아노를 그만두지는 마.” 만류하던 피아노 선생님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더이상 피아노에 손을 대지 않았다. 피아노를 칠 때는 시험이 끝난 뒤, 잠시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면 피아노 앞에 앉고 싶어 안달하며 소나기처럼 피아노를 쳤다.
돌이켜보면, 피아노 학원 간판을 마주칠 때마다 눈길이 머물렀다.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피아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지속적으로. 강렬하게.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몸의 기억이 깨어났다. 하지만 접촉만큼 자극적인 것은 없었다. 손가락이 건반에 닿으니 손에 새겨진 기억이 활발해졌다. 삶의 고귀한 순간을 재생할 수 있게 한 아빠. 덕분에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하나 더 터득하고 있다.
얼마 전 고향집에 갔을 때 먼지 쌓인 피아노를 쳐 보았다. 내 손길을 기다린, 아빠의 마음이 담긴 피아노. 나 자체로 타올라 빛을 발산하는 초가 되라고 내 피아노에는 촛대가 달려 있는가. 달팽이처럼 집이기도 하고 우주이기도 한 자신을 짊어지고 계속, 천천히, 나아가라고 기어가는 달팽이 같은 다리가 내 피아노를 떠받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