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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롭 Apr 09. 2023

가까이 하기엔 너무 큰

편지 같은 환하고 동그란 달 1

간판에 주메뉴인 사케와 오뎅은 한글로, 선술집 요리 비법을 전수했다는 문구는 한자로 적힌 사이야. 우리 동네에 있는 선술집. 횡단보도 앞에 있어 그곳을 자주 지나다녔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길 기다릴 때면 정면에 보이는 사이야에 절로 눈길이 가고, 건널목을 건너 그쪽으로 다가갈수록 출입문을 밀치고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밀려왔다. 사이야. 일본말인가 얼핏 생각하면서. 보도를 횡단해 사이야 바로 앞까지 와서는 눈길을 거두고 거기를 그저 지나치고는 했다. 

 

습관 같은 행동 패턴에 균열을 내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찾아왔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작정했다. 가보자. 왜 안 되겠는가. 수도승도 아니고. 술집에 혼자 오는 여자를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람? 


간판을 보며 발걸음이 재빠르게 사이야로 향하던 그날. 설레어 점잖게 걸을 수 없었다. 짝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두근거리며 출입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여기저기 술잔을 부딪치는 사람들은 정작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오든 아랑곳하지 않고 술에 취하고 말에 취한 이들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나는 혼자 술 마시는 사람들이 주로 앉을 법한 바에 앉아 히레사케 한 잔을 주문했다. 주문한 술이 내 앞에 놓인 뒤 복어 지느러미의 비릿한 향이 따끈한 청주에 스밀 때까지 기다렸다. 찻잎이 맑은 물에 우러나기를 기다리듯이. 고개를 숙이고 복어 향이 엷고 투명한 노란 술에 번지는 것을 지켜봤다. 


히레사케를 앞에 두고 그렇게 앉은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눈이 많이 내린 날, 스터디를 마치고 교수가 히레사케를 사주었다. 그때 난생처음 맛본 히레사케. 첫맛은 혀끝을 톡 쏘는 듯하면서 달큼했고, 복어 지느러미의 향이 청주에 짙게 배어들면 비릿한 맛이 강해져서 텁텁했다. 


히레사케를 처음 마시고 천둥 같고 바다 같은 교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를 경외했는데 그 마음이 지나쳐 눈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배우고 싶어 일부러 그가 재직하는 대학원에 진학하고도 그에게서 멀리로만 돌아서 다니는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학생이었다. “내가 지도 교수 맞지?”라고 교수가 물을 정도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큰 그가 그렇게라도 곁에 계속 있을 줄로만 알았다. 


지도 교수가 된 지 두어 학기 지나 그가 학교를 옮긴다는 소문이 들렸다. 정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린 날. 나는 땅에 발을 딛고 있으나 발을 디딘 땅이 사라져버린 것 같았고. 허공에서 흐느적거려도 도무지 착지할 곳이 없었고. 어디로 떠밀려 가는지 모른 채 흐물거리다 기진맥진했다. 울먹울먹 먼 데서 몰려오는 탄식 소리 어느 결에 들었을까. 그가 스터디를 함께 하자고 옛 제자들을 불렀다.


그 덕분에 히레사케를 처음 맛본 날, 실내는 주홍 불빛이 은근했고, 테이블에는 촛불이 타올랐다. 오뎅 국물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우리는 바에 둘러앉아 히레사케 한 잔을 앞에 두고 꼬치에 꿴 오뎅을 먹었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교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때 교수가 고개를 길게 빼고 구석에 앉은 내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그렇게 늘었어?” 그의 말을 “어떻게 그렇게 늘 웃어?”라고 나는 알아들었다. 


교수 앞에서 늘 긴장 상태였으므로 나는 웃지 않았는데? 이상하네? 생각하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벙벙하게 쳐다보자 교수는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하고는 “그래서 무섭다”고 했다. 취중의 교수가 하는 말에 기절할 것 같았다. 나는 정체되어 있어 괴롭고 결과물도 보여준 게 없었는데? 정말 이상하네? 절반은 말하고 절반은 머금고 있었다. “시를 보는 것을 보면 알지.” 


그는 술을 마셔서 칭찬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덕분이에요.” 의례적인 말 같지만 내가 가진 언어로 진심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그 뿐이어서 좀 갑갑했다. 교수는 고개를 저으며 열심히 하니까 그런 거라고 했다. “힘을 얻어서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내가 어떻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사람의 마음을 그가 어찌 모르겠는가. 제자들을 끝까지 지켜봐주지 못하고 떠나 남모르게 앓았을 것이다. 내가 헤매는 동안. 지도 제자가 아닌데 배울 기회를 얻어 나는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나 거의 표현하는 일이 없었다. 그제야 마음을 전했지만 그는 또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는 논문을 빨리 쓰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교수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보지 못한 나는 그날 비로소 눈빛을 바로 보았다. 히레사케 잔을 들고 그때를 생각하다가 혼자 요리도 하고 손님 시중도 드는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바에 있을 때 ‘사이야’가 무슨 뜻인지 물었다. 우리는 무슨 사이야, 라고 할 때 그 ‘사이’ 즉 ‘관계’를 의미한다고 대답했다. 


사이야. 술과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토요일 밤 그곳에 상대 없이 혼자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마주보는 사람 사이에 술이 다리가 되어 말이 건너다니고 있었다. 낯선 사람과 한자리를 하더라도 새로운 사이가 되어 문을 나설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문을 나서면 모두 고개를 들고 그리운 누가 보낸 편지 같은 환하고 동그란 달을 바라볼 듯한 밤이었다.     



그날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보름달을 읽고 읽은 날이었을까. UC버클리에서 연구년을 보내는 교수는 학위 논문을 쓰는 데 참고하라며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된 책 내용을 발췌해 메일로 보내왔다. 내 논문 주제를 기억하고 멀리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도움이 되는 자료를 보내주는 그에게 나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했으니. 깨달음이라는 목표가 생겨서 수행자가 되고 싶다고. 때에 맞지 않게 뜬금없이 너무 솔직한 글을 띄워 보내고. 


시간이 흐른 뒤 그의 귀국 소식을 듣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드러내지 못했으므로 대신에 몇 줄 메일로 안부를 전했다. 뒤늦게라도. 그제야 내가 아직 출가하지 않은 줄 알았는지 안심이 된다는 답장을 주었다. 짧은 답장을 길고 길게 읽었다. 안심이라는 글자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교수가 귀국한 지 헤아릴 수 없는 날들이 지나고 너무 늦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 일어 그를 만나러 갔을 때 그가 내게 꺼낸 말은 제자 중 두어 명이 공부를 그만두었고, 다른 과 학생 한 명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 그 후 어떤 교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단체로 정신과에 가기도 한다는 것. 그러니까 그는 내게 정신과에 한번 가보는 게 어때? 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왜 수행자가 되려고 하는지 교수는 묻지 않았으나 걱정하며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했을 것이다. 혹시 스트레스가 심해서? 죽음으로 곤두박질치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하지만 내가 수행자가 되려고 한 까닭은 깨닫고 싶었기 때문에. 깨달음이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존재를 탈바꿈하려는 변화의 욕망으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마다 새롭게 하고 날마다 새롭게 하라. 탕 임금이 목욕하는 대야에 새겨 스스로 경계했다는 그 말뜻이 좋아 가슴에 새기고 싶었다. 일신우일신을 알게 되고서 그 말이라는 거울에 나를 비추면 부끄러웠다. 스승의 날이나 새해에 교수에게 메일을 보낼 때면 나는 부족한 저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썼으니.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실한 나였으므로. 


요청하면 도움을 줄 마음으로 기다리는 분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거리를 둔 것도 나를 있는 그대로 보이기가 두려워서였다. 자신에게 걸려 넘어진 나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정신의 날개가 절실했다. 집 안에 웅크리고 있는 내 앞에 하필이면 그때 한 수행자가 어른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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