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같은 환하고 동그란 달 2
책상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산 중턱에서 회색 승복을 입은 수행승이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어 올리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녹번동 높은 언덕에 자리한 이층집에 산 지 7년이 넘도록 눈앞에 수행승의 토굴에 있는지 몰랐다. 열린 창으로 수행승을 우연히 목격한 그날 이후 계속 토굴로 눈길이 갔다.
내가 앉은 자리 정면에 토굴 문이 보였다. 문은 닫혀 있었다. 방안에서 그 문을 바라볼 때면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했다. ‘선정삼매에 드셨나 보다. 보이는 것을 차단하고 보이지 않는 마음에 집중을 하시나 보다. 서로 알지 못하지만 스님이 그 자리에 계셔 고맙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게 고마울 뿐이다.’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는 말이었으나 수행승은 내 안의 소리를 들은 듯이 문을 열고 나왔다. 눈앞에 그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놀라웠고 그럴수록 눈으로 그를 마중하고는 했다. 도를 닦는 수행자라 파장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굴리면서 꼼짝하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 토굴 밖으로 나온 그를 따라다녔다.
연령이나 얼굴을 식별할 수는 없지만 선 자세나 걸음걸이의 활기는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으니 산모롱이에 자리한 토굴과 언덕 위에 있는 내 방의 직선거리는 한 삼백 미터쯤 될지 모르겠다. 그 정도 떨어진 곳에서 뒷짐을 지고 산 아래 마을인 내 방 쪽을 한참 내려다보는 그를 마주하고 있다가 방안에 있는 내가 보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었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창문을 닫았다. 무연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어나 산으로 올라갔다. 토굴보다 더 높은 지점으로. 그곳에서 내 방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방에서 토굴을 올려다볼 때는 환했으나 산 위에서 내 방을 보자 어둠의 소굴 같았다. 그 안에 들어앉은 내가 보일 리 없었다. 만물은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고 그 에너지에 따라 감응하니 내 눈길이 해바라기처럼 그를 향한 까닭은 그가 발산하는 빛 때문인지 모른다.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이끌린 것은 고등학생이던 날 엄마를 따라 간 법회에서 한 스님을 보고서였다. 법문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 법회 장소인 문화원 강당에 가득 차서 나는 맨 뒤쪽에 서 있었는데 멀리서도 그가 뿜어내는 색다른 기운을 감지했다. 별세계에서 온 종족을 보듯 법문하는 스님을 내내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법문이 아니라 정진하는 자의 향기에 나는 감명 받았다.
정진하는 자의 향기는 보는 것으로 맡을 수 있었다. 거리를 유지한 채 수행자를 보는 것만으로 내 안의 구도자는 깨어나고 있었다. 토굴의 수행자는 내가 방안에서 지켜보는 줄 모르고, 산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본다 한들 내가 그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것이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저녁이면 예불을 드리는지 목탁 소리가 산 밑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어떤 소리보다 듣기 좋았다. 베푼다는 생각 없이 하는 그의 행위 자체가 보시였으므로 나는 그와 일면식이 없지만 산에 오를 때면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바위 아래 서 있는 불상 앞에 과일을 바치고 오곤 했다. 거기서 예불을 드리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창으로 토굴을 바라보다가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해 질 녘이라도 새벽녘처럼 새로 시작하고 싶은 나는 나에게 말해주어야 했다. ‘눈을 자신에게 돌려라. 자신을 주목하라.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의 이목을 두려워하라. 너의 눈이 너를 보고 있으며 너의 귀가 네 안의 소리를 듣고 있다. 너는 너의 눈 안에 있다. 너를 보라.’
마침내 창문을 닫았다. 마음을 다잡으려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학위 논문을 어서 끝내고 졸업 시기를 앞당기고 싶어졌다. 수행자의 길로 진입할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 것이다.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는 깨닫기 위해서이며 최상의 선택은 출가라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되었으므로 창을 닫는 행위가 아무 의미 없어졌다.
내가 동경한 것은 정진하는 수행자였으니 창문을 닫아도 마음은 길을 찾아냈다. 사이버 도량에 수행자들이 있었으니까. 스님을 만나러 절에 간 적은 없지만 나는 신심 있는 불자처럼 성실하게 사이버 도량 여기저기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사이버 도량을 돌아다니며 글을 읽고 법문을 듣고 명상하느라 해야 하는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세속의 가치가 아닌 깨달음을 향한 큰 초발심을 일으키는 것 즉 보리심을 일으킨 순간부터 우리는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출가는 마음의 출가, 심출가(心出家)입니다.” 한 수행승의 글에서 심출가라는 단어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글을 계속 읽어내려 갔다.
“『유마경』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내면 그것이 곧 출가이며 구족계를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등정각이라 하여 최상의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발심을 의미합니다. 큰 깨달음에 이르고자 발심하는 것이 바로 출가라는 것입니다.”
참된 출가는 심출가라고 하며 심출가 운동을 벌이는 글을 끝까지 읽기도 전에 나는 그 결사에 아무도 모르게 동참하기로 했다. 선택의 여지없이. 혼자서 21일 기도를 하고 회향할 때 그 수행승의 책을 엄마가 다니는 법당에 보시하고 싶어 사이버 사찰로 메일을 보냈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스님께서 다실 문을 훤히 열고서 빗소리를 들으시겠구나 생각합니다. 흔적 없이 사이버 도량을 드나들며 여름을 살고 있는 저는 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입니다.
지난해 모 재단에서 연구지원금을 받게 되어 돈벌이도 그만두고 요사이 공부만 하고 있었습니다. 공부에 걸림이 되는 것을 다 집어치웠는데도 진척이 없으니 마음은 너무도 답답하고 몸은 무기력한 날 보시에 대한 글을 읽고서 일깨워지는 바가 있었습니다.
공부 잘 하라고 법계에서 주신 돈을 회향하지 않았으니 정진이 더딘 것은 그 돈의 무게에 눌린 탓이라 생각되었지요. 매일 조금씩이라도 보시해야겠다는 마음을 내었습니다. 인연 따라 보시금이 스님에게로 가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스님의 신간을 읽고 법 보시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스님께 갈 돈으로 제가 법 보시해도 괜찮은지요?
스님의 글을 읽으면 이따금 눈물이 흐릅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알 수 없습니다. 제 방 큰 창에는 항상 산이 걸려 있는데 그 산에 올라 혼자 앉아 있다가 내려올 때면 바위 아래 서 있는 불상에 참배를 하지요. 그때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곤 합니다.
제가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보고 감동한 것일까요? 맑음은 향기가 없으나 향기 없는 향기가 심연을 일깨우니. 많은 이들이 그 향기 없는 향기, 자신의 향기를 맡았으면 합니다.”
불교 신자가 아니니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지 않는 한 수행승을 가까이에서 볼 일은 없었다. 창문을 열면 눈앞에 나타나는 수행승과 사이버 도량의 보이지 않는 수행승들에게 마음이 기우는 사이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났다.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문경에 있는 한 암자에서 수행자들과 산 여름날이.
휴학하고 일 년 정도 절에서 생활하면 좋겠다고 한 법사의 말이 우르르 쾅쾅 내 안에서 천둥치고. 그 말의 여운이 남은 자리에 하늘을 가르는 번갯불처럼 빗금이 쳐지는 것 같았다. 후회되었다. 그 말을 진작 듣지 않은 것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