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우유의 마력

by 강일영

우리 집에서 난 ‘딸기 공주’로 통한다. 두, 세 개씩 집어먹는 욕심에 귀여운 ‘공주’라는 단어를 붙여 달달하게 부르는 것이다. 집에서 왕왕 부르는 호칭이기는 했지만 ‘딸기 공주’는 집안의 모든 식구에게 공유되는 별명은 아니었다. 나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좋은 점만 눈여겨보는 아빠와 엄마의 입을 통해 오르내리는 애칭일 뿐이었지만, 여섯 살 꼬꼬마에게 있어 그런 사소한 진실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무려 가족 구성원 4명 중 2명에게 인정받은 공신력 있는 별명이었고, 여기에 스스로 크나큰 자부심만 붙이면 ‘공주’ 그 자체가 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내가 또 다른 딸기 공주를 만난 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초봄 무렵이다. 친구의 친구로 알게 된 선아는 등장부터 당차고 센세이션 했다. 난데없이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 당당하게 선 선아는,


“여기 딸기 공주가 누구야?”


라는 뜬금없는 질문과 함께, (아무도 안 물어봤는데 혼자 열 내며) 본인의 지나친 딸기 사랑을 늘어놓았다. 이후 혼자 얼굴이 빨개지고, 혼자 분노하고. 할 수 있는 온갖 행동은 다 하며 화를 내더니,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금기어를 꺼내고 말았다.


“딸기 내 거야!”


순간, 머리에 강한 스파크가 튀며 불꽃이 파팍! 튀어 올랐다. 다른 것도 아닌, 감히 내 최애를 건드리다니.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도 안 되는 일 아닌가!


나는 기꺼이 그 도전장을 받아들였다. 내가 곧장 빼액! 소리 지르며 맞대응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결투는 치열했고, 말리던 아이들은 지쳐갔다. 지켜보던 해님도 지쳤는지 끝내 저물어버렸고, 목적 없이 남은 우린 둥실 뜬 달님을 올려보며 휴전기를 맞이했다. 제법 늦은 시간이었고, 우리 역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먼저 일어서기에는 그놈의 자존심이 문제였다. 왠지 싸움에서 지는 것 같은 묘한 패배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애꿎은 침만 삼켜가며 눈알만 굴리고 있는데 자리에 뭉개고 있던 선아가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그것도 환하게 웃으면서.


“그래! 뭐.. 딸기 공주는 너 해! 나는… 뭐. 딸기 왕… 그런 거 하지 뭐. 원래 왕이 더 좋은 거니까!”


그날 나는 흙먼지 묻은 손으로 화해 신청을 하는 선아의 모습에서 어렴풋한 우리의 미래를 봤던 것 같다. 징글징글 맞게 싸우면서도 결국 붙어 있고, 투닥 대며 장난치면서 언제까지 함께 할 천진한 우리의 모습을. 긴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찬란한 색의, 또 넓고 깊은 그 마음들을.


지금까지도 우린 이 가죽끈같이 질긴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날 환영처럼 보았던 그 장면처럼 참으로 징하게 싸우고, 징글징글하게 다퉜지만, 하루가 아쉽다는 듯 우린 금세 화해했고 서로를 마주 보며 밝게 웃었다. 우리의 좋았던 순간엔 딸기 대신, 딸기 맛이 나는 ‘딸기 우유’가 들려 있었고, 행복의 순간마다 같은 놀이터, 같은 철봉에 기대어 딸기우유를 진하게 쭈욱, 빨아 넘기며 우리만의 시간을 되새기고, 또 각인시켰다. 즐거움의 때마다 가냘픈 우정을 단단하게 지켜주는 이 딸기우유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만나고, 또 사랑하자고 다짐했다.


2017년 11월 19일. 선아의 결혼 소식이 전해지던 그날도 우린 딸기우유와 함께했다.

선아와 나, 우리 두 사람이 자주 앉던 그때 그 놀이터, 그 철봉에서 우린 차갑게 식은 딸기우유를 마셨고, 끈적한 눈물을 한바탕 쏟아냈다. 그중 무엇보다 시렸던 건 선아가 덜덜 떨며 내게 건넨 청첩장이었다. 축하한다는 기쁜 말보다 손끝에 덤덤하게 전해지는 청첩장의 냉기가 먼저 다가와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아는 마냥 울고 있는 나를 보며,

“잘 살게.” 외마디를 건넸다. 선아 손엔 빈 딸기우유 팩이 꼭 들려 있었다.




선아는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면, 홀로 식탁에 앉아 딸기우유를 깐다. 쌍둥이 형제가 처음 걸음마를 뗐을 때, 아들 둘이 동시에 엄마라고 불러주었을 때, 육아휴직 후 직장으로 복귀했을 때 등. 행복이 몽글몽글 차오르는 순간이면 달짝지근한 딸기맛의 부드러움을 목청 끝까지 밀어 넣으며 즐거움을 만끽하고, 나와의 시간들을 되새기며 웃음 짓곤 한다며 제 안부를 전해오고 있다.


그래. 세상살이 지독하게 험난할지라도 우린 결국 딸기우유를 마시게 될 거야.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딸기우유는 있을 거고. 우린 끝내 행복할 테니까.


진한 딸기우유를 유리잔에 따라 바닥 끝까지 마셔본다.

생각만으로도 달콤해지는 우리만의 딸기우유에 특별한 마력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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