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인간의 필요
세상은 생각 없이 살기 어려운 곳
어릴 때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던 만화를 보면 항상 정의의 주인공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고난을 이겨내며 결국엔 악당들을 무찌르고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내용이었다. 만화 속 세상에 인간들은 모두가 선하며 가끔 나쁜 놈들도 등장하지만 그들은 곧 처단된다. 옛날이야기 속에서도 역시 악한 사람들은 반드시 벌을 받고 가난하고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
내가 읽었던 책 속에서 존재하는 불공평은 책의 끝 부분에서 대부분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책으로 배운 세상 속에서는 정의가 이기고 진심이 통하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생각을 심어 주기 충분했다. 그러나 점차 세상을 경험해 가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배웠던 세상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괴리감이 점점 커져갔고 그것은 혼란함으로 다가왔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의 보호자가 선생님과 상담 후 갑자기 그 학생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거나 우리 집에서는 돈이 없어하지 못하는 생일 파티 같은 것을 같은 반 학생들 모두를 집으로 초대해 정말 말 그대로 잔치를 벌인다거나 하는 일은 정말 작은 일에 불과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몇 번씩이나 실패해도 큰 타격을 받지 않는 삶을 살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기회가 주어지는 반면, 누군가에게는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외줄 타기 하는 기분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 때마다 그 줄에서 떨어지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까 봐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게 한다는 데 있다.
책에서는 세상의 불공평함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느니, 불평할 시간에 더욱 노력하여 세상의 불공평함을 없애기 위해 행동하라는 등의 글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상황에 당장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죽은 글이었다. 점점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세상과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나의 세상은 서로 전혀 다른 세상, 다른 시공간처럼 느껴져 결코 노력만으로는 메꿔질 수 없어 보였다.
루소는 인간이 불평등하게 된 것이 공동체 즉 사회의 형성과 거기서 비롯되는 소유와 권력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어린애가 노인에게 명령하고 바보가 현명한 사람을 이끌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 줌의 사람들에게서는 사치품이 넘쳐나는 상황을 그는 책에서 고발하고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발전된 현시대 역시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더 많이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게 되고 힘든 자는 더 힘든 삶을 살고 있다.
노력이 배신 한지는 오래되었다.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의 바퀴로 아주 잘 굴러가고 있다. 나와 같이 공부했던, 혹은 같이 자랐던 친구가, 후배가 나보다 더 많이 가졌다는 이유로 어느 날 나의 상사가 되어있고(혹은 더 잘살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나보다 일도 못하면서 권력에 빌붙어 아부만 일삼았던 동료가 나보다 먼저 진급하는 상황 정도는 이미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인다.
모두가 평등을 부르짖는 이 시대에서도 우리의 발 밑은 여전히 불평등으로 흔들리고 있다. 기울어진 밑바닥에서도 사람들은 모두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으로 오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모두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다시피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떻게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상의 불평등에 혹자는 인간이란 종족이 과연 세상에 대해 불평등을 논할 자격이 있는지를 묻기도 한다.
그러나 종을 통틀어 살아남았고, 우위에 설 수 있는 능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인간이기에(그 도덕적 가치를 논하기 전에) 능력주의에 따라 그중 몇몇 인간들은 더 많은 것을 누릴 자격이 주어져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그렇게 세상은 옳고 그름의 원칙이 아닌 능력의 원칙으로 이제껏 진화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약한 것들, 능력이 없는 생물들은 모두 불공평을 아무 불평 없이, 운명인 냥 받아들이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예전부터 해왔던 대로, 관습이라는 이유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운명인 양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혹은 나는 불편하지 않다는 이유로, 돈이 많거나 권력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편리에 따라 만든,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닌 이유들에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길들여진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인간이다. 세상에 불공평함이 존재함은 인지하되 그 불공평함을 바꿔나가야 할 필요성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진 인간이다. 불공평함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불행 역시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이란 것을 하는 인간이 될 필요가 있는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