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예의 바른 인간이라고?
사람에 대해 알면 알게 될수록 별로 기대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기대하지 않게 됨으로써 더 이상 상처받을 일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않을지라도 여전히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이 한 두 명 정도는 남게 된다는데 있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 연인 등이지 않을까 한다. 옛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생각해 보면 원래가 사람은 낯선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 큰 기대를 갖지 않는다.
직장에서나 학교에서 만나게 되는 친분을 유지하지만 자신의 선 안에 들여놓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약간씩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들에게서는 큰 상처를 받을 일은 없다. 크게 마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큰 대미지를 입을 가능성이 적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의 경우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의 사람인지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상처의 크기와 무게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예의를 지키지 않고도 어느 정도 이해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만이 깊은 상처와 배신감이 존재하게 된다.
어디까지 관계에 있어서 기대를 하지 않아야 할까?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연인에게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참으로 어려운 마음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랑하게 되면 사랑받고 싶은 기대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사람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예의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예의는 사실 그 누구와의 관계에 있어서라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어쩌면 현재의 인간관계 문제들은 자신의 무례함과 예의 없음은 인지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예의 없는 행동에만 너무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은 최소한의 예의를 나에게 차려줄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인 것이다. 이는 누구에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가까운 관계이든, 먼 관계이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존중받아야 하는 예의는 나를 위험한 관계로부터 지켜줄 것이고 다른 사람 역시 나의 무례함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누군가가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예의를 지키는 태도로 인해 불편함 내지는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의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이는 가족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토록 부부, 부모, 자녀, 친인척 등과의 관계를 끊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은 서로가 너무나 가까운 나머지 예의를 지켜 대해본 적이 없거나 상실된 채 지내왔기 때문이다. 내 자녀가 내 소유물이 아니듯이, 내 배우자가 나의 마음과 같지 않음이 당연하다. 부모님 역시 자녀가 독립하거나(사실 그전에 관계에서도) 결혼하게 되면 더 이상 예전과 똑같은 관계일 수 없다. 상대방(사랑하는 자녀, 배우자, 가족, 친구 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말과 행동이 예의의 범주를 벗어나게 되면 폭력과 무례함, 억울함, 분노 등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관계가 끊어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잊고 싶은 상처가 되어버리고 평생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기대할 만한 것이 없는 인간의 범주에는 나 자신도 포함된다는 것을 또한 잊으면 안 된다.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이미 괜찮은 인간이 아니게 된다. 스스로가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면 괜찮지 않은, 수준이하의 사람들(자신이 생각하기에)의 예의 없는 행동들에 대해 기분이 나빠지게 되는 것은 금방이다. 타인보다 도덕적으로(다른 면에 있어서도) 우월하다고 느끼는 인간은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이상 예의를 차릴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타인의 무례함으로 상처받은 나만이 중요하기에 타인의 괴로움 따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어나는 기분 나쁜 일들을 모두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과 이 관계에서 서로가 존중받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예의 있는 행동으로 조금이나마 방지할 수는 있다. 예의라는 것이 법적 강제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지킬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특별한 행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지 말아야 될 말은 하지 않고 배려할 수 있는 부분은 배려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인간 존중은 멀리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