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ejebell Sep 22. 2022

 착한 아이 증후군

그렇다고 나쁜 아이도 아니에요.

'착한 아이'라는 그 말 한마디가 뭐라고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때부터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착한 아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 앞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보통 '착한 아이 구나.'라는 칭찬을 들으며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며 자라게 된다. 그리고 사실 자신의 가장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착한 아이'와는 상관없는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부분은 이로 인해 외면받게 된다. 하지만 바로 이 부분이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아야만 아이들은 세상에 대한 안정감과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생존하는데 큰 힘이 된다.) 특히, 자기 자신이 느끼기에 아무것도 잘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 일 수록 자신이 택할 수 있는 본능적인 생존 전략이 '착한 아이'가 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자녀가 혼자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그러길 자녀에게 원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자신의 아이가 나쁜 아이가 되는 것을 바라는 부모는 없다. 그러나 말썽 한 번 안 피우고 부모나 선생님에게 반항한 적 없는 '착한 아이'는 세상에 없다. 그것을 바라는 것은 사실 부모의 욕심일 뿐이라는 것은 부모도,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착한 아이'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솔직히 아이가 착하다는 것은 부모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부모가 특별히 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처음에도 이야기했듯이 아이는 부모와 다른 고유의 자아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비슷한 성격은 있을 수 있지만 완전히 똑같은 성격(기질, 성향)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없다. 당연히 자녀는 부모와 다를 수밖에 없다. 자녀가 다르다는 점을 부모가 맞고 자녀가 틀리다  라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착한 아이가 아니라 그저 수동적이고 충동적인 아이이다. 주위 어른들이 뜻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것을 '착함'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그들의 진짜 의지와 여부는 물어보지도 용납하지 않았기에 나타낼 수 없다. 그렇기에 그런 아이들은 의지와 신중함, 계획성까지 만들어낼 수 없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하라는 대로 해야 했던 그들에게 다른 모습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 원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만들어 가느라 바쁘고 힘들다."   

   <가토 다이조/ 착한 아이로 키우지 마라>




장난꾸러기이든, 얌전한 아이이든, 말썽을 많이 피워 부모를 힘들게 하는 아이이든 어린 자녀들은 사랑받으며 안전하게 성장할 권리가 있으며 사랑받을 만한 착한 아이들이다. 그들이 성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부모의 눈에는 어린 자녀처럼 비친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모에게 사랑스러운 그 모습 그대로의 자녀가 될 수도 있겠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부모가 여전히 함부로 대해도 어쩌지 못하는 자녀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성인이 된 자녀 역시 역으로 생각해볼 수가 있는데 여전히 착한 아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상처받으며 그 역할을 수행하느라 고생하는 성인 자녀가 있을 수도 있고 아예 부모와 단절을 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노력을 할 수도 있다. 




부모님께 베푸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겨지고 사랑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두려움, 의무감, 죄책감에서 부모님께 베푼다면, 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항상 분노와 원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의존적인 방식으로 부모님께 베풀도록 스스로 강요하는 것은 사랑을 베풀지 않는 행동이다. 자식을 키울 때는 사랑을 주기는커녕 함부로 대했다가 나중에서야 부양받기를 바라는 부모들도 많다. 이런 경우라면 부모님을 돌보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학대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성장과정에서 부노와의 관계가 어떠했든 성인이 된 이후 그 관계는 바뀐다. 또한 우리는 자라면서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도 커지고 부모에 대한 감정도 바뀐다. 결국 부모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을 질 것인지는 본인 만이 결정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고차원적인 힘과 내면 아이와의 유대감 형성을 통해 어떤 것이 자신에게 옳고 사랑을 베푸는 행동인지 결정해야 한다.

     <마가릿 폴/ 내면 아이의 상처 치유하기>




지금의 자신은 성인이지만 여전히 착한 사람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린아이였을 때 시작되겠지만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게 될 때까지 이어질 수가 있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이룬 성취를 의심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에 의존하고 만성적인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사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부모의 자녀이다. 그러나 정확히 성인이 된 자녀이다. 더 이상 부모나 다른 사람의 인정과 관심을 받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자신에게 성장이 되는 어떤 길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다. 내면 속에 상처를 마주할 용기가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미움(특히 부모로부터)을 받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힘을 얻을 수도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언제나 '착한 아이'로만 살아갈 수 없다. 사람들 사이에는 늘 갈등이 존재한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써 아이들 사이에도, 어른들 사이에도 있다.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부모가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우리가 더 이상 '착한 아이'가 아니어도 언제나 그들의 사랑하는 자녀일 것이다. 또한 '착한 아이'역시 성장해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부모와 자녀) 알고 있다.

이전 03화 공격하는 부모, 반항하지 못하는 자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