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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jebell Sep 29. 2022

 원하지 않은 지원, 투자

난 평범해요.

"너는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해. 특별한 사람이야."

"성공해서 우리 집안을 일으키면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이런 말을 자라면서 누구나 들어보지 않았을까? 우리가 봤던 드라마 속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들이다.

사극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아예 처음부터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성장한다. 그것이 당연한 드라마의 시작이다. 자신이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열심히 과거를 볼 준비를 하고 그것을 위해 온 집안 식구가 그 한 아들을 위해 희생을 한다. 결국 모든 고생을 뒤로하고 주인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부모의 자랑뿐만이 아니라 동네의 자랑이 된다. 


요즘도 그 문화가 남아 시골 마을에 가면 알아볼 수 있다. 누군가의 성공에 대한 축하의 플래카드가 몇몇 개 안 붙어 있는 곳이 없다. 그들의 모든 마음은 선의에서 나온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리고 그들의 아이는 부모의 뱃속에서부터 꼭 그들이 못 이뤘던 꿈을 이루는 성공을 할 것이라는 축복과 희망 속에 커간다. 자녀가 잘 된다면 부모가 무엇인들 못할까마는 한편으로 이런 지원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어릴 때는 잘 모를 수 있다.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런 생각을 하도록 부모가 부추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의 그런 희생과 헌신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벗어나기 어려운 덫에 걸린 심정이 된다. 심하게 말하자면 내 미의 성공을 당겨와 부모의 아낌없는 지원과 사랑에 마치 저당 잡혀버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유교의 나라에서는 입 밖에 내서도 안되고 생각조차 할 수도 없는 몹시도 불경한 생각이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나이 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자녀의 본분이다. 하지만 어째서 저런 불경한 생각이 자꾸 머리를 맴돌며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면 왜 그런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이 부담을 넘어 점점 힘들어진다면 말이다. 정말 이상하고 나쁜 사람들이 부모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그 아이는 특별한 아이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린 자녀는 걸음마를 시작해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무한정의 지지와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 아이가 계속해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점점 커 갈수록 노력이란 것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다. 부모의 기대만큼 커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자아가 성숙해질수록 아이는 점점 부모와 다른 인격체로서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며 어른이 된다. 그러나 부모는 사랑스럽던 품 암의 아이가 자꾸 세상으로 뛰쳐나가려 할수록 불안을 느끼게 되기 마련이다. 


어느 가정이나 문제가 없는 가정은 없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부모가 성숙한 인간일수록 자녀를 자신의 소유가 아닌 한 인격체로써 차이를 인정하고 다름을 다룰 줄 알며 자녀를 독립된 존재로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 가정에 비극은 없을 것이다. 부모의 희생과 헌신은 감사로만 느껴질 것이며 어른이 된 자녀는 그것을 애정과 깊은 추억으로 자신의 자녀에게 대물림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 가족의 전통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이야기가 이렇게 아름답게 끝이 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녀의 재능과 탁월함, 가치는 자녀 고유의 것이다. 그것을 꽃피울 수 있게 부모는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녀의 발목을 잡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이런 종류의 사건들을 주변에서 많이 봐왔다. '빚투'라고 해서 뉴스와 인터넷에서 기사가 쏟아질 때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의 재능과 유명세에 기대어 사람들을 속이며(심지어 자녀도 속이며) 사기행각을 벌였다. 바다 건너 나라에서는 유명 아역 연예인의 부모가 서로 자녀의 매니저가 되어 돈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 이혼한 경우도 있었다. 자녀는 물론 혼자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재능이, 그 가치가 부모가 없었다면 꽃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인 것이다. 부모라면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같은 하소연을 하거나 자녀가 자신의 삶에 대해 죄책감, 부채감을 가지게 해서는 안 된다. 자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부모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노력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가끔 자기밖에 모르는 부모(같지 않은 부모)가 있다. 그들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언젠가 자신이 투자한 만큼, 또는 희생한 만큼 자녀에게 당연히 보답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 같이 모두가 힘든 시대에서 나 혼자 먹고살기도 힘든데 부모의 모든 것을 자녀가(만일 형제도 없다면) 온전히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책임져야만 한다면 자녀는 심적으로, 물질적으로도 많은 부담과 절망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런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을 그때(지원, 투자받을 때) 알았더라면 부모에게 그 어떤 지원도 바라지 않았을 짓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성인 자녀에게 자신이 기대한 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하면 부모와 자녀는 갈등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자녀의 마음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자녀의 성공에 이제 부모들의 고생은 끝이라는 생각과 자녀의 실패에 몸져눕거나 지나친 실망을 자녀 앞에서 내보이는 것은 부모 자신들의 그런 행동이 사실은 투자자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미 원하던, 원하지 않았던 과거는 지나갔다. 자녀는 부모에게 양육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부모도 자녀를 최대한 잘 키울 의무가 있다. 그것을 투자로 느껴지게 하는 행동이 잘못된 것이다. 자녀가 어려서 앞으로의 일어날 일을 어떻게 판단하여 부모의 지원을 안 받겠다고 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연은 본래 인간을 만들기 위해 우리를 낳았다. 우리는 예외 없이 어머니 몸에서 태어났으며 어둠 속에서 나왔다. 우리는 그렇게 탄생한 작품으로서 각자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만, 각자의 길을 알려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다."

                                                                      - 헤르만 헤세




자녀는 부모의 물질적 지원에 대한 인질이 아니다. 그들의 삶은 부모 자신의 뜻과 다르다고 해서 자녀에게 이제까지 받은 모든 것을 다시 내놓으라고 할 수 없다. 자녀는 투자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뜻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 또한 그것을 위해 성인이 되기 전까지 보호받고 지원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자녀는 자신에게 최대한의 지원을 해줄 수 있는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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