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기가 싫었던 걸까?
가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느끼고 당황했던 경험이 있는가?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과의 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고 짐작했었던 친구, 이웃, 동료, 심지어 가족 중에서도 자신의 그러한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그것에 대해 적절한 공감을 보여주는 능력은 사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에너지를 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자신과 친하고, 같이 얽혀 있거나, 속으로는 싫어도 계속 얼굴을 봐야만 할 때라면 그때가 바로 이 에너지를 써야 할 때인 것이다. 적어도 '그런 척'이라도 해주는 것이 이 사회 속에서 같이 살아나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인 것이다. 그런데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이런 예의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어떤 주제에 공감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 이상하고 예의 없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을 두고 보면 공감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어쩌면 누구에게도 사회적 예의를 갖추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는 아니더라도 발견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몹시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제로인 사람의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자신만의 관점으로 보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그런 것이 아예 안 되는 사람인 것이다. 자신에 대해 주장하고 입장을 말할 시간도 부족한데 왜 다른 사람까지 신경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인 것이다.
아이들의 리액션은 최고의 공감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공명을 찾는 행위다. 아이들은 각자 지극히 다른 행위를 드러낸다.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인 행동 또한 무의식적인 호소인 경우가 빈번하다.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 세계는 우리를 무감각하게 또는 우울하게 만들며 공격적인 성향을 키운다. 그러면 결국 중독될 만한 것을 찾아서 의지하게 될 수도 있다. 아동과 청소년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공명도 받지 못하면 몸을 돌리고 만다. 그렇게 공명이 결핍된 틈 사이로 소셜 미디어나 그 외에 인터넷 세계가 제공하는 다른 무언가가 밀려들어온다.
<공감하는 유전자/요아힘 바우어/매일경제신문사>
이 관점에 지극히 공감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들며 심지어 공격적으로 만드는 것은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인정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그런 환경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부분이다. 특히 요즘처럼 혐오가 마치 유행인 듯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는 이유는 서로의 말이 공명되었던 경험의 결핍에서 온 것은 아닐까?
공감을 할 줄 아는 능력은 공감을 받아본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다 그런 것은 분명 아니지만 사랑을 많이 받아본 사람이 더 쉽게 사랑을 줄 수 있는 법이다. 공감 능력이 제로인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람과 같다. 늘 그 관심과 사랑은 자신에게로만 향하고 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 대한 그 무엇도 자신의 사랑보다 먼저 일 수 없고 자신을 대신할 그 무엇도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자신 말고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우리도 사랑할 수 없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슬프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더 슬프다.
-미겔 데 우나무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