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빠삐용은 1973년 프랭클린 J. 샤프너가 감독하고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이 열연한 영화다. 제리 골드스미스가 작곡한 배경음악은 영화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았다. 그 곡에 가사를 붙인 노래 <Free as the wind> (바람처럼 자유롭게)는 ‘나비’라는 주인공 별명에 담긴 뜻처럼 상징성이 있다. 앤디 윌리엄스의 애절하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가 빠삐용과 드가를 오랫동안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주인공 빠삐용과 드가.
영화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각색한 것으로 주인공 이름은 앙리 살리에르다. 1931년 파리에서 앙리 살리에르(스티브 맥퀸 역)는 억울하게 살인죄로 기소된다. 살인을 하지 않았음에도 범상치 않게 살았던 그를 범인으로 모는 상황으로 인해 그는 유죄판결을 받는다. 사람들은 가슴에 나비 문신을 한 앙리를 빠삐용(프랑스어로 나비)이라 부른다.
프랑스 령 기아나 감옥에 갇힌 앙리는 열악하고 견디기 힘든 그곳에서 유약하고 겁 많은 위조지폐범 드가(더스틴 호프만 역)를 만나 우정을 키운다. 중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이 갇힌 곳답게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악행과 폭력이 난무하는 감옥에서 앙리는 수차례 탈출을 시도하지만 매번 다시 잡혀와 독방에 수감되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죽어서 나온다는 독방에서 벌레로 연명하며 끈질기게 목숨을 잇는 앙리와 드가가 마지막으로 이송된 곳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떠 있는 섬, 절대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고립된 감옥이었다. 앙리는 아찔하리만큼 높은 절벽에서 밤마다 야자수로 속을 채운 포대를 바다에 던지며 탈출할 꿈을 꾼다. 마침내 야자수 포대가 물 위에 뜨면서 물살에 실려 절벽 반대방향으로 나가는 것에 성공한 앙리는 드가에게 탈출을 제안하지만 드가는 체념한 상태로 그곳에 머무르겠다고 한다.
작별하는 순간 친구 앙리를 바라보는 드가 눈빛과 표정에서 그도 친구와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인다. 시력이 좋지 않은 드가가 깨진 안경을 끈으로 묶고 있는 모습이 더욱 초라하고 서글프다. 마치 날개를 단 듯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바람처럼 자유롭게 바다 위를 떠가는 앙리와는 달리 떠나지 못하는 드가, 점점 멀어져 가는 앙리를 허탈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바라보는 드가 모습이 처연하다.
앙리처럼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축복일 거란 생각과 동시에 고통스럽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더 나쁜 상황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체념으로 머무르는 드가에 대한 연민이 인다. 의지했던 친구와 탈출하지 못하고 그를 떠나보내며 작별하는 드가가 애처롭기 그지없다. 드가의 체념한 듯한 표정에 제리 골드스미스가 작곡한 <바람처럼 자유롭게> 멜로디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내내 잊혀지지 않는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중 기억나는 인물은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 역)다. 로버트 제임스가 쓴 소설을 1995년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해서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 <메디슨 카운티 다리>의 한 장면
중년 여인 프란체스카 존슨은 메디슨 카운티에 사는 평범한 가정주부다. 무뚝뚝하지만 성실한 남편과 두 자녀가 며칠간 여행을 가서 그녀는 혼자 집에 남게 된다. 그즈음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크린트 이스트우드 역)가 마을을 찾아온다. 메디슨 카운티에 있는 로즈먼 다리 사진 촬영을 위해 온 그는 소박하고 순수한 프란체스카를 만난다.
열정적인 사랑 없이 남편과 살며 자녀를 성장시킨 프란체스카는 비록 짧은 4일 동안이지만 로버트에게 느낀 감정이 진정한 사랑이라 확신한다. 로버트 역시 이제까지 보낸 날들은 프란체스카를 만나기 위해 존재한 것이라 여기고 그것이야 말로 참사랑이라 생각한다. 두 사람은 미래를 함께 하기 위해 떠날 약속을 하지만 그녀는 가족과 연인 사이에서 갈등한다.
비 내리는 날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있는 차 안에서 자신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로버트 자동차를 바라본다. 옆에 앉은 남편이 그런 아내의 갈등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차문 손잡이를 부여잡고 내릴까 말까 망설이던 메릴 스트립의 표정 연기가 압권이다. 로버트는 애타게 프란체스카를 기다리지만 끝끝내 나타나지 않는 연인으로 인해 절망하며 떠난다.
무심한 시간은 흐르고 나른한 일상이 이어지는 어느 날, 로버트는 소포를 받는다. 연인의 딸이 어머니의 일기장과 유품을 로버트에게 보낸 것이다. 15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각기 다른 공간에서 두 사람이 여전히 서로 사랑하고 그리워했음을 로버트는 절실하게 깨닫는다.
만약 그녀가 사랑이란 이유로 남편과 두 자녀를 버리고 로버트와 떠났다면 그렇게까지 여운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했지만 가족을 떠나지 않고 그리움을 견디면서 자기 자리를 지켰기에 오히려 아름답게 기억되고 독자나 관객에게 감동을 준 것일 게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자유를 만끽하며 살겠다고 배우자와 자식을 헌신짝 버리듯 쉽게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가는 요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주인공이 고통스럽게 갈등하면서도 가족을 떠나지 않는 모습은 맑은 물처럼 깨끗하게 독자들과 관객들을 정화시켜주었다. 그저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나는 것만이 최선이고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준 것이다.
사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빠삐용보다는 드가 같은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영화 속 설정이 감옥이나 수용소라 우리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는 다른 조건이긴 해도 우리 삶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빠삐용처럼 시련이 닥쳐도 이겨낼 의지와 신념으로 끊임없이 현실을 벗어나려 애쓰는 유형도 있겠지만, 현실에 순응하면서 새로운 도전이나 요행을 바라기보다는 하루하루 지루할 정도로 고된 삶을 이어가는 드가 같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남들이 볼 때는 그저 초라하고 척박한 환경일지라도 그 안에서 씨를 뿌리고 하늘과 자연을 느끼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이웃이고 그들이 이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 오늘도 자신이 사는 공간에서 묵묵히 하루하루 일상에 충실하게 전념하는 수많은 드가와 가족을 지키는 프란체스카를 닮은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