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프레스야 잘 가
그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좋았지. 나 망원동 살 때 한형대 관장형 소개로 서교동 맥스짐에서 처음 만났잖아. 처음에 네 앞에서 어쩔 줄 몰라서 쭈뼛거리고 있을 때 형대 형이 좀 친해져 보라고 둘이 붙여놨던 게 생각이 나네. 길고 가느다란 몸에 새빨간 너. 너와 처음 닿았을 때 느껴진 차갑고 거친 표면. 그 표면 덕에 내 손 안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착 감기는 느낌까지 생생해. 네 매력을 채 다 알기 전 너 자체만으로도 나는 너를 감당하는 게 버거웠어. 너만 닿으면 부들부들 떠는 나를 형대 형이 잡아줘야 했으니까. 그래도 네가 너무 좋아서 너를 공부했어. 너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주변에 운동 좀 했다는 형들한테 물어봤어. 유튜브 영상도 많이 봤지. 그렇게 나를 네가 채운 거야. 매일 네 매력을 알아가면서 널 향한 가슴의 울림도 조금씩 커져갔어.
나도 그렇게 군대를 급하게 가게 될 줄은 몰랐어. 안 그래도 늦게 가는데 마음이 점점 조급 해지더라고. 그래도 군대에서도 자주 볼 수 있을 줄 알았지. 요즘 군대는 자기개발하기 좋고 시간이 많다고 들었으니까. 훈련소에서는 많이 힘들더라. 너를 볼 시간은커녕 운동할 시간 자체가 많이 없었으니까. 남는 시간에 생활관에서 침상 끝을 잡고 동기들이 가지런히 정리해둔 슬리퍼와 활동화, 그리고 군화를 보면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 역부족이었지. 자대에 가서 너를 다시 마주했을 때는 너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설렜어. 그런데 기동대 체력단련실은 너무 작았고, 너는 인기가 너무 많았어. 막내였던 나는 자연스레 자리가 많은 철봉으로 관심을 옮기게 됐지. 그래도 나중에는 일주일에 한 번은 봤잖아. 다른 부대에 파견 갔을 때도 항상 너를 찾아갔잖아. 군대에 있던 것 치고는 잘했잖아. 그런데 철봉이 더 좋은 건 어쩔 수가 없더라.
처음 봤을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전역한 후에 집 앞 더블에잇 헬스장을 찾았을 때, 조금 두렵긴 했지만 용기를 내서 다시 네 앞에 섰어. 같이한 시간이 참 무섭지. 오랜만에 만나는데도 익숙하더라. 너를 움켜쥐고 굴곡지는 내 허리, 부푸는 가슴, 목에 서는 핏대까지 그대로였어.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너와 함께하기 위해 내 몸을 네게 맞춰갔지. 나날이 우람해지는 대흉근과 더 유연해지는 흉추. 가냘픈 손목에는 손목 보호대까지 사서 휘감고 네 앞에 섰어. 너와 깊고 무거운 사랑에 다시 빠져갈 때. 몸은 계속 좋아졌지만 허리는 가면 갈수록 상태가 나빠지더라. 그걸 무시하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 너도 잘 알잖아.
그래도 응암에 와서도 너를 빼놓지 않았어. 달리기에 정신이 팔렸지만 그 와중에도 응암역 멀티짐에 주 3 번은 갔잖아. 달리기에 불필요한 너지만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너무 좋았으니까. 너를 놓아줄 생각은 하지 않았어. 그런데 허리는 계속 안 좋아지더라. 너한테 말해도 너는 스쿼트랑 데드리프트가 나쁜 거라면서, 너한테는 잘못이 없다고 했잖아. 근데 주변에서 말해주더라고. 이제 그만 만나라고. 달리기에 도움도 안 되고, 그러다가 허리 나간다고. 그래서 너한테 말 안 하고 2주 동안 살아봤어. 잘 때부터 다르더라. 고통 없이 누워 본 게 2년 만이었어. 왜 알고도 모른 척했어? 먼저 말해줬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었잖아. 고통받지 않아도 됐잖아. 스쿼트랑 데드리프트한테 서운하게 안 했어도 됐잖아.
요즘엔 오버헤드 프레스랑 만나고 있어. 너만큼 가슴을 키워주는 친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깨랑 삼두, 조금의 가슴까지 착실하게 챙기는 친구야. 너랑 달리 벤치가 필요하지도 않고, 허리를 활처럼 휘게 해서 요추에 무리를 줄 필요도 없어. 두 다리로 바닥에 굳게 서서 전신에 힘을 주는 연습을 하다 보니 밸런스 잡는 데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나는 이제 네가 필요 없어. 가끔은 같이 꿈꾸던 웅장한 대흉근이 눈앞에 아른거리겠지만, 허리를 잃을 바에는 그런 가슴 없는 게 나아. 잘 지내. 그동안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