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백을 해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좋아하던 아이에게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직접 말하지 못했다. 내가 했던 일이라고는 고작 그 아이에게 고백한 친구를 찾아가 '너와 내가 라이벌이다.'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고백은 경험하지 않았지만 연애는 경험했다. 그녀는 조용한 카페의 소파에 나와 나란히 앉아 '우리 무슨 사이야?'라고 물었다. 나는 상대방의 질문에 대답한 것이 전부였다.
자신감이 없었다. 혼자 좋아한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상대에게 다른 목적 없이 나와 시간을 보내 달라고 말했을 때 돌아왔던 '엥?'이라는 대답이 트라우마가 됐다. 엥? 과 연애 경험을 토대로 내가 먼저 다가가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때문에 친구인 상태에서 썸으로 발전하는 그 비약적인 단계 앞에서 항상 무릎 꿇기 일쑤였다.
그런 내가 고백을 시도했다. 전에 결심한 대로 무리하지 않고, 여러 가지 주어진 상황과 기회 속에서 차곡차곡 상대방과 무언가를 쌓아가려고 했다. 어느 한쪽에서 고백을 하지 않으면 이상한 관계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도중에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았다. 방해는 우연의 산물이었지만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무언가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쉬운 길을 선택했다. 고백을 기도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고백은 자살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고백을 실패한 일은 철로에 뛰어들어서 자살하려고 했으나 철도 공사 파업으로 기차 운행을 하지 않아 집으로 돌아온 것과 다르지 않다. 그나마 시도했다는 뿌듯한 마음을 안고 말이다. 비장하게 마지막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섰지만 기도에 실패하고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저녁밥을 맛있게 먹었다.
고백은 살인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실행하기 전까지 변수가 많다. 남자는 관계가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자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상대방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네가 죽든 내가 죽든 해보자가 되었다. 사귀든 안 사귀든 결판을 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쩌면 고속으로 달리는 차의 핸들을 트는 자살테러와 같다. 질리는 순간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다른 이들의 안위는 온데간데없다.
하지만 고백은 자살도 살인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준 사람이 있다. 복잡한 계산과 계획의 의미가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 고백은 오갈 곳 없는 이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가 아니다. 고백은 시속 140km로 달리는 차의 핸들을 꺾어 도로를 나뒹구는 일과는 다르다. 죽고 죽이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도로에 큰 장애물을 발견해서 핸들을 틀어 비켜가는 것과 비슷하다. 고백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계속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고백을 하기 전 몰아치는 감정의 비는 어긋난 방향으로 나있는 물길을 바로잡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