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아름답다?

by 석담

코로나 거리두기 해제를 앞둔 주말이라 고속도로는 그야말로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그가 회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차를 고속도로에 올려 오늘 모임이 예정된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을 네비에 입력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달려온 지 갓 한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남해고속도로와 만나는 내서 분기점은 밀린 차들의 물결로 갈길 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꼼짝없이 붙들어 놓았다.

아마 앞쪽 어딘가에 사고라도 난 듯했다.


그가 광안리 해수욕장 초입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려 거리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거의 세 시간 만에 그는 목적지인 광안리의 숙소에 도착했다.

배도 고프고 피곤해서 짜증이 슬슬 올라올 무렵 휴대폰이 울었다.


"어디야? 네가 너무 늦어서 시장 횟집에서 저녁 먹고 친구들이랑 숙소로 가려고. 숙소 앞에서 조금만 기다려"

이번 모임을 준비한 동기 총무의 전화였다.

쫄쫄 굶고 있는 자신을 배제하고 자기들끼리 밥 먹으러 간 친구들 때문에 그는 슬그머니 부아가 났다.


거의 7시가 되어서야 친구들이 꽉 막힌 광안리 해변도로를 따라 숙소에 도착했다.

그는 콩나물국에 횟집에서 포장해 온 모둠회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사이 술안주와 술이 준비되어 푸짐히 차려졌다.


그녀는 얼굴살이 좀 빠진 듯했다.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나 일방적인 짝사랑을 했던 그녀.

그래도 열릴 줄 모르는 그녀의 맘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들을 고뇌했던가?

그렇게 헤어지고 대학교 때 다시 만나 뜨거운 사랑을 했던 그녀였다.

서둘러 시집간 그녀를 원망하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심정이었던 그는 환갑을 앞둔 늙다리 중년이 되었다.


친구들은 벌써 술이 무르익어 난상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도 소맥에다 서너 잔의 소주를 들이켜 약간 취기가 올라 있었다. 그리고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동기들 간의 로맨스로 넘어가서 서로 시시덕거리며 서로의 치부를 까발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니는 왜 그때 내한테 좋아한다 말 한 번도 안 했는데?"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그녀는 한잔 술에 무장해제가 됐는지 사정없이 훅 치고 들어왔다.


"뭐라고? 내가 좋아한다는 말과 표현을 얼마나 했는데? 니 기억 안 나나?"

그는 발끈했다. 그리고 그동안 잠자고 있던 '용기'라는 놈이 고개를 쳐들었다.


"진짜가? 우리가 같이 경주랑 진주 놀러 간 거는 기억나는 데 뭐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경주 놀러 갔다가 너네 집에 놀러 갔는데 니가 미역국 끓여 줐다 아니가? 그거는 기억나제?"

"그거는 기억난다. 근데 우리 키스 같은 거는 했었나?"


드디어 그녀가 무덤을 팠다

그는 그녀의 꺼져가는 기억을 소생시키기 위해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카페에서 만나 키스했던 거 생각 안 나나?"


순간 친구들은 '와'하는 함성과 함께 정신없이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연거푸 소주잔을 들이켰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잠든 친구들을 남겨두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휴게소에 도착하여 커피를 마시며 어젯밤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에게 한 통의 카톡이 왔다.


"내가 지나고 보니 추억은 추억이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이 최고야"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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