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회사 부장들은 휴가 안 간다 하더만 김 부장 니는 왜 이렇게 일찍 가냐"
주말 끼워서 4일 휴가 주면서 돌아서 나오는 뒤통수에다 대놓고 휴가 간다고 뭐라 하는 사장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 도망쳐 나왔다.
나만의 서재 낙만정에서 첫날밤은 얼마 남지 않은 모바일 데이터를 써가며 세간의 화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면서 보냈다. 아쉽지만 농막에는 와이파이가 안 된다.
진정한 자연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티브이도 설치하지 않았다.
초저녁에 한줄기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렸다. 비 그친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 박혀 있었다. 시골은 별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일까?
이튿날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고 싶었는데 습관이 무서운 거라더니 여섯 시 반에 눈이 떠졌다.
일단 오늘 미션은 한 가지씩 해두고 나만의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푸른색에서 하나둘씩 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고추밭 약치는 것이 오늘의 미션이다.
칼슘제와 탄저병약, 그리고 전착제까지 꼼꼼히 섞어서 충전식 분무기를 둘러메었다.
한말(20리터) 짜리 분무기를 메고 200포기 되는 고추밭의 구석구석까지 약을 뿌려댄다. 어린애 목욕시키듯이 조심스럽게.
다음 할 일은 안경을 잃어버리신 아버지 새 안경을 해드리는 것이다. 본가에서 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평소에 무뚝뚝하게 말씀이 없으신 아버지가 오늘은 내게 조곤조곤 말씀을 하신다.
"언제 왔느냐?, 애들은 잘 지내느냐?, 며느리는 언제 휴가냐?'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인터뷰에 나는 버벅대며 답할 수 있었다.
내비게이션이 안경점 앞에 도착했다고 알렸다.
"아뿔싸, 시간을 확인 못했네"
안경점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시계를 보니 9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안경점 문 앞에는 10시부터 문을 연다고 떡하니 쓰여있다. 급한 마음에 문에 쓰인 전화로 전화를 했다.
"열 시에 여는 건 맞는데 제가 대구에 있어서 20분쯤 늦을 거 같아요"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50분을 꼼짝없이 기다려야 한다.
차에 시동을 켠 채 10분쯤 기다리다 청도역 근처의 다른 안경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두 번째 안경점은 다행스럽게도 이미 문이 열려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보니 가게에는 아무도 없었다.
탁자 위에 '잠시 외출 중입니다'란 메모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지체 없이 전화를 걸었다.
"제가 지금 대구에 와서 가려면 40분쯤 걸립니다. 죄송합니다."
두 번째 찾은 안경원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그리고 내 깊은 곳에서 억눌린 분노의 감정이 슬슬 기어 나오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전혀 불평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계셔서 내가 더 머쓱 해졌다.
마침내 세 번째 안경점에서 아버지의 안경을 해드릴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첫 번째 안경원 사장의 도착했다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나는 이렇게 답장을 하고 싶었다.
"개점 시각과 폐점 시각은 고객과의 약속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확히 지켜져야 합니다.
만일 지키지 못할 일이 있으면 사전에 문 앞에 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고객에 대한 의무이고 약속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써서 보내지 않고 그냥
"다른 매장 왔어요" 이렇게 보냈다.
아마도 주접러가 되고 싶지 않았거나 소심러라서 그런 것이리라.
오후 시간에는 무릎까지 자란 옥수수 밭의 풀을 뽑았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온몸이 흠뻑 젖었다. 힘들어서 몇 번을 쉬어가며 뽑았다. 마누라가 뱀 나올까 봐 무서워 못 들어가겠다는 말이 떠올라 차마 중도에 때려치울 수는 없었다.
오늘의 미션을 완료했으니 이제 나만의 휴가를 시작한다.
그동안 읽으려고 몇 번이나 마음만 먹고 읽지 못한 책 세 권을 끄집어내었다.
국민도서로 알려져 안 읽은 사람이 거의 없는 책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제레드 다이아 몬드의 총, 균. 쇠'가 그것들이다. 인문학 서적은 펴기만 해도 잠이 오던데 무사히 독파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권은 황순원 문학 전집의 장편으로 잠 올 때 짬짬이 읽어볼 생각이다.
이만하면 나의 소소한 휴가 준비는 다 된듯하다.
좌탁 위에는 밭에서 갓 따서 삶은 옥수수와 싱싱한 과일이 준비돼 있다.
나의 소소한 휴가는 계속되어야 한다. 쭈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