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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 날의 추억

by 석담 Jan 3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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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토요일이 입춘이란다. 혹한의 시절이 끝난 듯해서 더없이 반갑다. 여름을 특히 좋아하는 내게 입춘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입춘 다음 날이 정월 대보름이라는 사실은 낮에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서야 알게 되었다. 오곡밥과 보름나물을 준비하신다고 먹으러 오라신다.


내게는 보름날의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40년도 더 된 이야기다. 아마도 중학교 때로 기억한다.

봄 방학을  맞아 방문한 큰어머니 댁에서 나는 정월 대보름을 보냈었다.




동갑의 사촌과 어울려 하루종일 들로 산으로 쏘다녔다.

산토끼 한 마리 잡아 보리라 호언장담하고 올라간 산에는 토끼는 고사하고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잔설이 남은 겨울산은 고즈넉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아침에 먹은 콩이 들어간 찰밥과 나물 반찬은 내 입에 영 맞지 않아서 조금 먹는  시늉만 하다 숟가락을 놓았다.

하루종일 쏘다닌 탓에 허기가 져서 토끼몰이는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집에 갈까?"

동갑내기 사촌은 내 맘을 꿰뚫어 보는 듯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어 너무 고마웠다.

"그래 가자."

나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우리는 어둑어둑해진 산길을 내려와 집으로 향했다.

어느새 동쪽 하늘에는 둥근 보름달이 떠 올랐다.

"야, 달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 도 없이 우리는 동시에 외쳤다.


아침에 오곡밥을 먹기 전 큰어머니는 우리에게 강정을 주시며 "부스럼 깨물어라"라고 말하라고 하셨다.

사촌과 나는 너무 우습고 황당해서 몇 번이나 망설이다 겨우 웃음을 참아가며 "부스럼 깨물어라"를 했다.

나는 혼잣말로 '그거 한다고 부스럼 안 나나?' 하며 빈정거렸다.


사촌은 나와 동갑이다. 하지만 내보다 생일이 보름이나 빨라 사실은 형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형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시골에서 자란 사촌은 무식하지만 용감했다.

경운기에 나를 싣고 몰고 가는 그를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큰어머니 댁에 도착했을 때  보름달은  이미 하늘 높이 올라 있었다.  우리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집 앞 들판으로 달려 나갔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우리들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쥐불놀이를 하고 있었다. 사촌은 오늘 쥐불놀이를 위해 깡통과 철사를 구해서 며칠 전에 쥐불놀이 기구를 벌써 만들어 마루 밑 깊은 곳에 숨겨 두었다.


나는 처음 보는 쥐불놀이의 풍경에 매료되어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동심원을 그리며 밝게 빛나는 쥐불놀이 불빛은  신비롭고 황홀하기까지 했다.


한편으로는 곧 내가 할 쥐불놀이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내 가슴은 쉴 새 없이 뛰기 시작했다.

사실은  쥐불놀이를 잘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더 컸었다.


쥐불놀이 깡통에 들어 있던 나무 조각에 불이 붙고 사촌은 먼저 시범적으로 깡통을 돌리며 시범을 보여 주었다.

깡통에서 불이 환하게 피어나 돌아가면서 둥근 테두리의 불빛을 만들었다. 사촌은 내게 깡통을 건네며 말했다.

"너도 해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깡통을 받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뭐가 문제인지 사촌처럼 불이 환하게 피어오르지 않고 연기만 자꾸 났다.


사촌이 다시 내 깡통을 받아서 불을 다시 살려서 내게 건넸다.  나는 다시 힘을 주어 힘차게 돌렸다.

마침내 나의 쥐불놀이 깡통이 환하게 타올랐다.


나는 더욱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옮겨가며 불꽃을 밝혔다.

마치 밤을 밝히는 수호신이라도 되는 듯이...

사촌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악"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논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사촌이 놀라 내게 달려왔다. 내 신발 아래에 나무 조각이 붙어 있었고, 그 나무조각에 박힌 대못이 내 운동화를 뚫고 내 발바닥을 사정없이 찔렀던 것이다.

사촌은 놀라서 내 이름을 부르며 괜찮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발이 너무 아파서 고통에 몸부림쳤다.

사촌은 침착하게 나무를 잡고 못을 빼냈다. 나는 녹슨 못이 내 발에서 빠져나가는 서걱거림을 느끼며 전율했다.


나는 그 순간 달빛에 번들거리는 사촌의 눈동자를 보았다.

사촌은 빠른 손놀림으로 내 운동화를 벗기고 양말도 벗긴 후

논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내 발목을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못에 찔린 내 발바닥을 빨기 시작했다.


그는 몇 번이나 내 발바닥의 상처에서 피와 녹이 섞인 불순물을 빨아 침과 함께 뱉어 냈다.

내 발바닥에는 못에 찔린 구멍이 동굴처럼 나 있었다.

나는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흐느꼈다.


사촌은 나를 들쳐 없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게 속삭였다.

"오늘 집에 가서 못에 찔린 거 들키면 큰엄마한테 혼날 건데..."

나는 등에 엎드려 자는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밝게 빛나는 보름달이 우리를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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