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으로 그리고 맏이로 여태껏 살아오느라 지차들의 볼멘 소리나 불만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도 않았고 둘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내 주변에 있는 지차들의 고단한 삶을 돌아보게 된 건 맏이로서의 내 삶이 너무 편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그냥 맏이의 조명받는 삶에 비해 티가 나지 않는 지차의 삶을 한 번쯤은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지차들이 느꼈을 소외감이나 박탈감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외갓집이다.전국의 5일장을 떠돌며 장사를 하시던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와의 사이에 자식으로 6남매를 두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군대에서 돌아가신 얼굴도 모르는 큰외삼촌은 외갓집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한 재원이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어려운 살림에 대학까지 졸업했던 큰외삼촌은 군대 생활중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외할머니께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난다.
큰외삼촌이 대학을 다니기 위해서는 나머지 형제들의 많은 희생이 따랐다. 어머니를 포함한 여자 형제는 물론, 막내 외삼촌까지 누구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맏이를 위해 지차들은 그 희생을 당연한 듯 받아들여야 했다.
지차 중 누구도 그 현실을 부정하거나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아내는 여자 형제들 중 둘째이다. 서열로는 둘째지만 아내의 부모님 사랑은 맏이 못지않았다. 처형이 서울에 있으니 얼마 전에 혼자되신 장인어른 뒷바라지는 아내가 도맡아 하고 있다. 5남매의 둘째 딸인 아내는 어릴 적 그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새 옷을 얻어 입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고 했다. 운이 좋으면 언니가 입던 옷을 물려받아 입었고 어떤 때는 오빠가 입던 남자 옷을 얻어 입은 적도 있었단다.
일찍 공무원으로 일을 시작한 아내는 경제적인 형편이 좋아 부모님께 냉장고며 티브이를 거침없이 놓아 드리고, 한 번씩 장모님을 백화점에 모시고 가서는 크게 한턱을 내곤 했다고한다. 아내는 그렇게 잘해 드려도 언니한테는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면서 자기한테는 맨날 뭐라고 하신다며 불평을 종종 했다.지금 생각하니 그게 지차의 설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랬었다. 장모님은 항상 처형을 맏이로 대우했었다.
그렇지만 아내는 그냥 둘째 딸, 지차였다.
아내는 그것을 차별 대우라고 이야기했다.
언니는 맏이라서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도했다.
내 막내 남동생은 나보다 일곱 살이나 적다.
막내다 보니 어릴 적에도 어리광이 심했고 지금도 부모님께 살갑게 대해 드리며 데면데면한 나랑은 많이 다르다.
내가 부산을 떠난 지 20년이 훌쩍 넘었으니 사실상 20년 넘게 부산에 사시 던 부모님을 동생이 오롯이 돌본 셈이다.
난 그저 명절이나 생신에 한 번씩 들러 생색만 낼 뿐이었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하나 얹은 격이라는 게 딱 맞을 듯하다. 주말마다, 때로는 주중에도 본가에 들러 부모님을 보살피는 동생에게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동생은 항상 불만이 없었다.
부모님과 맏이인 나 사이에서 성실한 중재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해 온 동생의 성실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어머니의 장남에 대한 사랑은 유별났다. 그래서 나는 자라면서 항상 특급대우를 받고 자랐다.
어렵던 살람에 서울까지 대학을 보낸 것부터 그랬다.
어머니는 항상 '우리 장남' 하시며 나를 챙기셨다.
동생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한 맏이에 대한 어머니의 과잉 사랑에 상처 받았을 동생의 마음을 이제 내가 보듬어 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