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산행일지(2023년 3월 18일 - 19일)

by 석담


결혼하고 나서 아내가 대학 때 산악반을 잠깐 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아내는 1년에 한두 번 설악산, 지리산으로 산행을 다녀왔다.

금요일 저녁에 출발하는 무박종주 산행을 주로 떠났다.


나는 언감생심 그런 힘든 고행의 길을 따라가려는 시도는 물론이고 생각조차 감히 하지 못했다. 대신에 집 근처의 앞산이나 조금 멀게는 비슬산, 가야산, 금오산, 덕유산까지 아내와 함께 다녔다.

지난겨울에는 아내를 따라 남덕유산의 설경을 보고 왔는데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며칠 전 갑자기 지리산을 올라야겠다는 강한 충동이 생겼다.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를 생각하니 더 늦으면 가고 싶어도 못 갈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니, 어쩌면 아내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시작한 도전이었다는 게 더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나 아직 이렇게 생생하다고, 여전히 쓸만한 남자라고 말하고 싶었다.


울산에 사는 대학후배에게 동행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장터목대피소 1박을 예약했다.

당일로 다녀오는 건 너무 힘들 것 같아 1박 2일 코스로 잡았다. 중산리에서 장터목으로 올라 1박 한 후에 천왕봉에 가서 일출을 보고 로타리 대피소로 하산하는 계획을 세웠다.


아내에게 천왕봉 오를 거라고 했더니 40리터 배낭을 챙겨주며 완주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강한 자신감을 표현하며 산행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3월 18일 아침.

어제까지 흐리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하게 개어 있었다. 울산에서 온 후배를 태우고 중산리 탐방지원센터를 향해 출발했다. 2시간을 달려 지리산 초입에 도착했다.

브런치로 정식을 먹고 탐방지원센터 앞의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작한 산행은 잠시 후 반복되는 후배의 "잠시 쉬었다 가입시더"라는 멘트로 계속 브레이크가 걸렸다. 몇 번이나 "조금만 더 가서"라고 달래다 결국엔 쉬고 또 쉬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너무 맑아 내일 해돋이에 대한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한번 만에 달성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큰 행운이란 말인가?


후배랑 대학 때 추억을 더듬으며 걷다 보니 칼바위를 지나고

유암폭포를 지나 장터목 대피소를 1.2킬로미터쯤 남겨둔 고난도의 등산코스에 도달했다.


한발 두발 힘겹게 내딛다 보니 장터목 대피소의 박공지붕이 보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돌리며 우리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그리고 지리산에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한 시각은 채 오후 4시도 되기 전이었다. 조금 이른 감은 있었지만 점심이 빨랐기에 저녁을 일찍 먹기로 했다. 가져온 라면을 끓이고 대피소 매점에서 구매한 즉석밥을 데워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의 백미는 배낭 깊숙 한 곳에 넣어 가져 온 한우 치맛살 구이 였다. 육즙이 가득한 한우를 먹으며 산행 첫날을 마감했다.


대피소에는 벌써 많은 등산 마니아들이 도착해서 자기만의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도 내일 해맞이를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새벽 5시에 대피소를 떠나 천왕봉 정상으로 향할 것이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선잠을 자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떠보니 등산객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후배는 입맛이 없다며 아침을 거부하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공복으로 천왕봉을 향해 헤드랜턴 불빛을 밝혔다.


오직 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해 밤길을 더듬어 천왕봉을 향해 나아갔다. 산 등성에는 매운 칼바람이 불었고 밤하늘에는 손톱같이 서늘한 그믐달이 떠 있었다.

100미터쯤 앞에는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등산객의 한점 불빛이 보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밤이라 거리도 가늠하기 힘들었는데 낯선 삼거리에 도착했다. 우리는 좌측과 우측으로 나누어진 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머뭇거렸다.

그때 우리 뒤에서 따라오던 체격 좋은 젊은 친구가 좌측이 맞다며 호기롭게 앞으로 나아갔다.

채 10미터도 가지 않아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오던 다른 무리와 마주쳤다.

그렇게 한 번의 시행착오도 겪었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군데군데 얼음이 녹지 않은 구간과 급경사 구간이 나타나 우리를 힘들게 했다.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을 지나자 서서히 여명이 밝아 왔다.

그리고 바람은 태풍급으로 강하게 불었고 장갑 속으로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정확히 6시 35분이 되자 동쪽 끝 하늘 연무 위로 해가 올라왔다. 그곳에 모인 스무 명 정도의 등산객들은 일시에 와하는 탄성을 지르며 깊은 침묵에 빠져 해가 떠오른 풍경을 응시했다.

나도 그 무리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일출의 장관을 담았다.

해는 순식간에 떠올랐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남기고 하산길에 올랐다.


하산길 내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리고 느리더라도 쉬지 않고(Steady & Slow) 무언가를 항해 끊임없이 나아가야겠다는 각오를 했다.

설령 그 끝에 만족할 만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지리산 천왕봉 일출 동영상에 콜드 플레이의 Viva La Vida bg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