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을 채워둬야 마음이 편했던 날들.
신혼집 가전을 장만할 때 냉장고 크기를 고민했다. 가전제품은 클수록 좋다는 ‘거거익선’이라는 말에 꽂혀있던 때라 아주 커다란 냉장고로 결정했다. 냉장실과 냉동실 모두 공간이 아주 넓어서 2인 가구용으로도 충분할 뿐만 아니라 아기 이유식을 시작하더라도 충분히 사용하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냉장고에 채워진 식재료와 음식이 많지 않아서 여유로웠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반찬을 넣으려고 해도 장 본 것을 넣으려고 해도 공간을 억지로 만들어야 하는 날이 생기기 시작했다. 테트리스 하듯 차곡차곡 넣어두고 나면 한동안 먹을 것이 많아서 식량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든든함을 느꼈다.
그런데 막상 먹다 보면 눈에 보이는 것만 꺼내 먹게 되거나 새로 산 것만 먹게 돼서 안쪽에 보관해둔 것은 잊혔다. 이렇게 잊힌 것은 곰팡이가 피거나 맛이 변하거나 먹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식재료와 음식을 구입하는 데에 든 비용과 음식물 처리하는 데에 드는 비용까지 비용은 이중으로 들었다. 환경에 대한 죄책감까지.
미국에 온 뒤에 냉장고는 기존에 쓰던 냉장고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처음 냉장고를 보자마자 이걸로 어떻게 지내나 싶은 마음에 막막했다. 쟁여두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당장 먹을 것을 보관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기준을 세워야 했다. 늘 냉장고에 챙겨두고 싶은 것과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 그 기준이 필요했다.
생각보다 냉장고에 꼭 둬야 하는 것은 많지 않았다. 아기에게 줄 우유, 요거트, 계란. 그리고 끼니 준비에 필요한 고기, 채소 몇 가지. 나와 남편이 좋아하는 커피, 탄산, 맥주. 그 외에 마요네즈, 딸기잼, 고추장, 된장 등 각종 소스류. 그 외에는 딱히 두지 않기 시작하니 냉장실이 여유로워졌다. 냉동실도 얼음, 냉동 채소 몇 가지를 빼고 나니, 공간이 채워지지 않았다.
식량을 채워둬야 마음이 편했는데, 그때그때 필요할 때 장을 봐서 조리하고 챙기기 시작하니 냉장고 공간도 여유로워지고 마음도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재료가 부족해서 식사를 못 하는 날도 없었다. 걱정되고 불안했던 상황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3-4일 혹은 일주일에 1번만 필요한 만큼 장을 보고 요리를 해도 세 식구가 식사하고 간식을 먹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한국에 돌아가도 이제 큰 냉장고를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 오기 전에 내키지 않던 모든 것들이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키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된다. 나는 아직도 미니멀 라이프가 어렵다. 그러나 분명 조금씩이지만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