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ramram Jan 19. 2022

눈 떠보니 예식 날짜가 잡혀있던 비혼주의자

아침에 눈을 뜨고서는 전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시 되돌려 봐야 했다. 어느 시점의 기억부터 차근차근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부터 시간의 역순으로 과거 여행을 시작했다. 이미 바닥에 있는 널브러진 옷들을 보았지만, 발로 대충 밀어놓고 오후에 하나씩 치우기 시작할 것이다.   

 결제 내역에는 6900원이 찍힌 걸 보니 아마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왔을 테고, 그래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술에 취할 때마다 철저한 귀가 본능이 발동해 사고는 안 친다는 점이다. 주위 사람들의 목격들을 요약하자면 내가 과하게 취해 보이는 어느 시점에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에 가겠습니다”하고 바로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가버리는 내가 걱정돼서 같이 있던 사람들이 택시를 잡아주거나 계속 전화를 하는 선의를 베풀었지만, 이제는 알아서 잘 가는 사람으로 인식이 돼서 그동안 선배들로 인해 굳었던 택시비가 내 사비로 충당되고 있다. 

 아. 술에 취했을 때 내가 말하는 사고의 기준은 나와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다음날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으로 기준을 삼았다. 그래도 나는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그런 사고는 치지 않았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 술버릇이 그래도 양반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때부터는 오히려 필름 끊기는 횟수가 늘어난 것 같기도 하다. 의사들 말로는 그렇게 술 먹고 블랙아웃이 되는 게 정말 안 좋다고 하지만, 어차피 철부지가 하루아침에 인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고가 있을 수도 있다. 나와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아량이 넓어 내 사고를 다 이해해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별 신경 안 쓰는 것도 사실이다. ‘술 먹다 보면 뭐 좀 사고 좀 칠 수도 있지’라는 뻔뻔한 생각들도 내가 좋아하는 대응방안이다. 

 다시 전날의 기억들로 돌아가서 결제내역의 힌트로는 이미 명을 다했고, 시간의 순서와 상관없이 흐릿한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야 했다. 이날 술자리는 부장과 선배, 예식장 사업을 하는 양반(부장의 대학 후배), 나 이렇게 넷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3차 횟집의 자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더 무서운 건 꼬치 가게의 기억도 잠깐 스쳐 지나갔는데, 내 기억에 없는 내가 4차까지 갔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기억이 나는 건 3차 가게 화장실에서 토를 하는 장면이었고, 3차 가게에서 같이 있던 대표가 진상을 부리던 장면, 또 내가 부장의 물렁한 팔뚝을 만지며 놀리는 장면 등이 떠올랐고, 다행히 2차까지의 기억은 생생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애정 하는 블랙아웃에 대한 정상적인 검토였지만, 점심을 시키고 나서 부장에게 온 전화로 그 분위기는 뒤바뀌었다.

 “대표한테 연락 왔다. 5월 9일 날 비어있다고 해서 일단 그날로 예약 걸어놨다. 알겠지?” 다짜고짜 부장이 무슨 예약을 걸어놨다고 하니 대표와 함께하는 다음 술 약속이나 골프 약속을 잡았거니 했지만, 이런 약속을 무슨 8개월 뒤까지 잡아놓는지 부장은 참 이상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모님이랑 상의 안 해도 되겠어?” 

 순간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사람으로 변한 나는 전날 술자리에서 나온 부장과 대표의 말들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우리 막내, 연애 얼마나 했지?’, ‘그럼 결혼할 때 됐네?’, ‘미리 예약을 걸어놔야 해’, ‘내가 일정 보고 연락을 줄게’, ‘대표야, 우리 막내 거기서 결혼하면 알아서 다 해줘라’ 등 나도 어떻게 보면 위기에 능한 사람인 것 같다. 3초 만에 부장이 잡은 예약이라는 것은 내가 결혼하는 예식장 예약이라는 것을 눈치챘고 이때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이상한 답변을 하고 말았다. 

 “아. 네. 금방 부모님이랑 통화했습니다. 좋아하시네요”

이때만 해도 해병대 선배이기도 했던 부장의 말이 곧 법이기도 했기에 실망을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부장이 물은 말에는 습관적으로 ‘알겠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좋습니다’ 등의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1년 지나서는 부장을 동네 형 만나듯 대하긴 했지만. 혹시라도 전날 기억이 없는 제스처를 취하면 또 부장에게 아쉬운 소리를 들을 게 뻔하니 이날도 습관적으로 부장의 제안을 아무렇지 않게 흡수하고 말았다.

 “그래. 잘됐네. 일단 그렇게 알고 있어. 그리고 아마 예약금 얼마 걸어놔야 할 거야. 쉬어라” 

 부장과 통화를 끊고 나서는 이 모든 문제를 요약해줄 선배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자고 있던 게 분명했지만, 자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이 착한 선배의 말로는 결국 부장과 대표가 술김에 으쌰 으쌰 하는 분위기 따라 나도 못 이기는 척 받아주었다는 게 골자였다. 크게 신경 안 써도 된다는 선배의 말에 위안을 삼기도 했지만, 일단 나는 어지럽게 바닥을 뒹굴고 있는 옷가지들을 정리해놓고, 어느새 도착한 배달음식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러고 나서는 테이블에 앉아 다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때부터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결혼’에 대한 내 가치관을 하나씩 들쳐보았다. 

 일단 나는 내 성격이 그리 결혼과 어울리지 않은 성격 탓에 자칫 결혼 대상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결혼은 나와 맞지 않은 옷이라 결론지었다. 결혼과 어울리지 않은 내 성격 중에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을 즐기고, 술을 과하게 마시고, 그리고 단편적으로 능력이 그렇게 출중한 사람도 아니라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만약에 결혼을 한다면 나는 꼭 사람만 보고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질적인 것이나 현실적인 것을 따지지 않고 나는 남들과는 다른 결혼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배달시켰던 음식이 서서히 식어가는 걸 보고 있었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결혼 생각이 없었는데?”, “이러다 나 진짜 결혼하는 거 아니야?” 미래에 대한 겁과 어쩌면 행복에 대한 기대감으로 채워지면서 하나씩 나에 대한 물음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이 시작이 내 결혼관에 대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흘렀을 무렵, 결국 나는 ‘내 주제에 무슨 결혼이냐’라는 생각을 끝으로 헛웃음을 짓고 잠깐의 꿈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