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민우 이야기 - 지우고 싶은 기억
<연재소설> 비밀의 부부
그날 이후 위층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적이 몹시 거슬렸다.
위층으로 올라가 봐야 하나 고민하다 사나흘이 지났고 그 후 다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잊고 지내게 되었다.
오히려 듀끌로 덕분에 진영이와 화해해서 취소하려던 고급 레스토랑에도 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분위기 내보고 싶다. 한참 잊고 지냈던 우리만의 시간. 오늘은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진영이가 샴페인 잔을 들어 내 앞으로 내민다. 로제 와인 속 핑크 탄산이 춤을 춘다. 파랬던 하늘이 갑자기 회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직원이 주고 간 메뉴판을 보았다. 영어로 쓰여 있지만 직접 보지 않는 한 어떤 음식인지 가늠하기 힘든 설명이다.
신기하게도 남자용 메뉴판에만 가격이 나와 있다. 진영이는 여성용 메뉴판에는 가격이 안 적힌 걸 보고 신기해하다가 시대착오적이라 비판하면서 내 메뉴판과 자기 메뉴판을 바꿔 버렸다.
나는 예약할 때 이미 가격을 봤지만, 진영이는 처음 보는 거라 꽤나 놀란 눈치다. 그녀는 음식에 대한 설명 대신 가격만 유심히 본 후 가장 싼 코스요리를 골랐다. 인당 200유로. 나는 내심 안심했다.
“부잣집 도련님이면서 돈도 잘 버는 소설가 남편 덕에 내가 호강이야.”
진영이는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구나, 나는 진영이에게 참 많은 것을 감추고 있구나 확인할 수 있는 멘트였다.
우리 집안이 부유한 건 맞지만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 바치지 않는 한,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주신 집 외에는 내게 돌아올 돈은 한 푼도 없다는 것, 그리고 나는 인세가 빵빵하게 들어오는 유명한 소설가도 아니거니와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되기는 어려워 보이는 애매한 소설가, 그러니까 책은 내지만 수익은 그다지 크지 않은 글쟁이일 뿐이란 걸 진영이는 모르고 있다. 책을 내는 것이 평생 꿈인 진영이는 책을 한 권만 출판해도 꿈을 이룬 것이고, 크게 성공한 것이고, 대단한 소설가가 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잊을 만하면 책이 한 권씩 출판되는 나를 굉장한 소설가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며칠 전 은행 잔고를 보면서 이제 진영이의 환상을 깨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이번에 한국에 가서 유산으로 받은 집을 팔기로 했다. 아직은 그녀의 과대평가를 즐기고 싶다.
이 세상에서 나를 높이 평가해 주고, 과하게 인정해 주는 단 한 사람.
성인 팔뚝만 한 커다란 빵을 어깨에 받쳐 든 웨이터가 테이블로 다가와 빵을 썰어 접시에 놓아주었다. 시큼한 향이 코 끝을 맴도는 걸 보니 발효가 잘 된 빵이다.
웨이터가 곁들일 와인은 어떤 걸로 하겠냐고 물었다. 코스 요리 가격에 와인은 포함되지 않는다. 물 역시 포함이 아니다. 식전에 먹은 샴페인에 와인, 물까지 하면 식삿값 외에도 이십만 원가량 더 추가될 것이다. 와인과 물은 코스가 끝날 때까지 아껴 먹어야겠다.
“음식 고르고, 와인 고르고. 나는 이런 게 너무 피곤해.”
진영이는 벌써 지쳐버렸다. 너무 좋아해도 부담스러울 것 같지만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는 것도 맘 상하긴 마찬가지다. 여의치 않은 주머니 사정에 큰맘 먹고 힘들게 온 건데.
전채 요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전담 웨이터가 개인당 한 명씩 배정되었다. 물을 따라주는 웨이터는 또 따로 있었다. 뭘 굳이 이렇게까지... 부담감에 음식이 넘어갈지 모르겠다.
전채 요리는 토마토로 만든 갖가지 음식이었는데 얼음을 띄운 노란색 주스가 가장 맛있었다. 토마토를 저온에서 열두 시간 구우며 한 방울씩 채취한 주스라나. 외운 문장을 프랑스 억양이 강한 영어로 혼잣말하듯 쏟아내니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제공되는 음식은 접시라는 빈 공간에 표현된 예술이었다. 음식이 직경 30센티가 넘는 커다란 접시 중앙에 화룡점정 찍듯 심혈을 기울여 소량만 나왔다. 여러 코스가 나오니 전체적으로 적은 양은 아닐 테지만. 대신 빵 접시가 비면 지체 없이 빵을 새로 놓아주었다. 물 역시 조금이라도 잔에서 줄어들면 바로바로 채워 주었다.
나는 고급진 유리병에 든 생수 뚜껑을 거침없이 따는 웨이터가 거슬렸다. 저런 병에 담긴 물을 이런 레스토랑에서 주문하면 한 병당 만 원은 내야 할 것이다. 돈은 내가 내는데 왜 나에게 묻지도 않고 계속 물병을 따는 건지. 나는 저렇게 여러 병을 마실 생각이 없었는데.
게다가 잔 속의 와인이 줄어들 때마다 웨이터는 더 주문하겠냐고 물었다. 끊임없이 배려하는 서비스 정신인 건지 와인 없이 식사하는 것이 이토록 이상한 일인 건지 헷갈린다. 작정하고 나왔지만 예상외로 야금야금 늘어나는 식삿값에 나는 점점 예민해졌다.
메인 요리가 나왔을 때 웨이터가 요리에 대해 설명했고 진영이는 맛을 보기도 전에 입맛을 잃고 먹기를 꺼렸다. 이유는 이 그림 같은 음식의 재료가 비둘기였기 때문이다.
다른 메뉴를 시킬 걸 후회할 수도 없다. 어차피 다른 코스는 우리가 엄두 내기 힘든 가격이었기에 음식에 대한 설명도 안 읽고 골랐으니까.
목이 탄 진영이가 물을 마시다 와인 마시기를 반복하고 있다. 웨이터가 다가와 와인을 더 하겠냐고 물었다. 결국 한 잔씩 더 주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한 병을 시킬걸.
진영이는 술에 의존해서 먹으려는 듯 와인을 벌컥벌컥 마셨다. 안 먹던 음식이라 생소할 뿐이지 닭도 먹고, 오리도 먹고, 자주는 아니라도 꿩도, 칠면조도 먹는 데 비둘기가 뭐가 그리 이상하다고 못 먹는지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작은 조각을 입에 넣어 씹다가 고문당하는 표정으로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그러다 이내, 그녀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고개를 두리번거렸고, 물을 서빙하는 웨이터는 또 새 물병을 땄다.
갑자기 이 모든 것이 다 거슬리기 시작했다. 내가 없는 세계에 갇혀버린 진영이도, 내 허락 없이 10유로를 잡아먹는 저 웨이터도, 뻔한 주머니 사정에 물까지 아껴 먹으면서 여기 앉아 있는 나도.
“하지 마.”
“뭘?’
“지금 하려는 거 하지 말라고.”
“내가 뭘 하려는데?”
“포장해 달라고 하지 말라고.”
“······ 왜 하지 마?”
“분명히 말했다.”
그녀의 마음에 내 자리가 있긴 할까?
“왜 그러는데?”
엄마 옷을 입고 엄마 놀이하는 아이.
한국을 떠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멀리 떠나오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을 되돌리기 위해 죽을 때까지 애쓸 진영이를 살리고 나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맞지 않는 옷은 이제 벗으라고 하니 자기 옷이라고 울며 떼쓰고 있다. 나한테도 없던 엄마를 그깟 고양이들이 뭔데 갖는단 말인가. 그것도 내 자리까지 뺏으면서. 순간 복받쳐 오르는 감정에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밖으로 나와 레스토랑 옆으로 연결된 호텔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 앞 잔디밭 주변으로 형형색색의 고급 스포츠카들이 주차되어 있다. 줄지어 선 저 차들만 팔아도 커다란 성 댓 개는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 10유로짜리 물 한 병 때문에 예민해지다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건 진영이가 아니라 나였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일주일 전 듀끌로와 한바탕 한 다음 날 산 담배다. 그날은 잘 참았는데 결국 입에 물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정말 죽을 것 같은 순간은 잘 참아내다가 별일 아닌 일에 피우게 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태운 게 언제였더라.
5년 전, 아이들을 며칠 간격으로 한 명씩 떠나보내고 한 달쯤 지나 물건을 어떻게 처분해야 하나 고민하던 때였다.
첫째가 일주일간 베고 있었던 베개가 가장 문제였다. 텅 빈 아기침대에 놓인 베개에는 햇님이의 머리 자국만 남아 있었다. 단 일주일이었는데. 곁에 있었던 시간보다 없었던 시간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데. 늘 있었던 것이 사라진 듯한, 회복할 수 없는 허전함이 인두 자국처럼 남아버렸다.
그전에는 또 언제 피웠더라...
십 년 전이었고, 진영이가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이었다.
출산을 위해 입원한 선영이 누나가 진영이가 많이 다쳤다고 병원에 가 봐 달라고 부탁했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진영이를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일이 많은 회사에 다니느라 연락이 뜸한 줄로만 알았는데··· 구두 뒤축 모양으로 멍이 내려앉은 그녀의 왼손에는 담배 지름 크기의 화상 상처가 덧나 있었고 약지에는 피떡이 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간호사에게 받은 진영이의 핸드폰을 찬찬히 뒤져보았다. 사진과 메시지, 인터넷 검색 내역들··· 보아하니 헤어진 건 오래전인데 만난 기간의 열 배는 더 시달린 듯했다.
머릿속에 뒤엉킨 생각과 계획이 정리되었을 무렵 진영이가 눈을 떴다. 까맣게 멍든 눈 속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머리맡에 있는 물병에서 물을 따라 진영이에게 내밀었다. 진영이는 한숨 쉬며 눈을 감았다.
“신고는?”
“소용없어.”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진영이는 핏자국이 남아 있는 손을 뻗어 내 핸드폰을 잡았다.
“어차피 다시 올 거야.”
그녀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죽게 두지. 그럼 지금쯤 다 끝났을걸.”
어린 시절 내가 병원에서 했던 생각이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지금은 또 얼마나 무서울까. 나는 그녀가 두려워할 만한 행동은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아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고 가시덤불처럼 지독하게 엉킨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걱정 마. 이제 못 와.”
나는 진영이가 잠들었을 때 그녀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병실을 나왔다. 걱정하고 있을 선영이 누나에게 염려 말라는 전화를 한 후 병원을 나섰고, 진영이가 퇴원하는 날 두려움에 떠는 그녀에게 앞으로 그 깡패 새끼 때문에 걱정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하면서 담배를 태웠다.
몇 모금 빨지도 않았는데 꽁초만 남았다. 아쉽지만 그만 들어가야 한다.
테이블로 돌아가니 진영이가 밝게 웃어 주었다. 우리는 좀 전에 싸웠던 사람들이 맞나 싶게 아무 일 없는 듯 식사를 계속했다. 치즈를 먹고, 와인을 마시고, 치즈를 욕하고, 물을 마셨다. 와인 잔이 비자 웨이터가 다가와 와인을 새로 따라 주었고, 나는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와인을 옆으로 밀어버렸다.
“안 마셔?”
“운전해야지.”
“그럼 시키지 말지 그랬어?”
“자꾸 묻는 게 귀찮아.”
술을 못 마시는 진영이는 이미 두 잔을 다 비우고 벌겋게 취했음에도 내가 밀어 둔 와인을 마셨다. 그녀 머릿속에서도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나 보다.
치즈 코스가 끝나고 나니 웨이터가 이번에는 다양한 종류의 원두를 진열해 놓은 카트를 밀고 왔다. 하나하나 설명하며 향을 선보이기에 대충 흘려 들었는데 마지막에 갑자기 무슨 커피로 하겠냐고 물었다. 케냐요. 기억나는 한 단어를 말했다.
커피 카트가 지나가고 디저트가 한 상 가득 차려졌다. 놀랄 만큼 많은 종류와 양이었다. 표면을 살짝 그을린 머랭 쿠키와 막대 사탕, 온갖 종류의 초콜릿, 초콜릿케이크, 레몬 젤리, 깐레(cannelé)··· 프랑스 사람들은 정말 이 많은 종류의 후식을 식사 후에 먹는단 말인가? 단 걸 안 먹는 진영이가 종류별로 하나씩 맛보고 있다. 맛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나를 위한 연기임을 잘 안다. 그만 먹으라고 하려다 관두었다. 오랜만에 나를 위해 애쓰는 모습을 더 보고 싶다.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초콜릿케이크를 먹을지도 궁금했다.
“담배··· 시작한 거야?”
진영이가 깐레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이 많은 것 중 내가 가장 좋아할 만한 것을 딱 골라, 내 앞으로 옮겨 준 것이다. 아무것도 필요 없이 그저 이런 마음, 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걸 그녀는 알까.
“그런 거 아니야.”
“그럼?”
“가끔은 된다며?”
“내가 뭘 어쨌다고 숨이 넘어갈 만큼 힘들대?”
진영이가 초콜릿케이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녀가 케이크를 못 집도록 접시를 뒤로 물렸다.
“그만 가자.”
자리에서 일어나니 직원이 우리의 겉옷과 함께 빵이 든 봉지를 건네며 레스토랑에서 직접 만든 빵을 조금 포장했다고 했다. 남자 성인 팔뚝만 한 빵은 우리에게 할당된 빵이고, 남으면 싸주는 것 같다. 놀랍게도 물값은 청구되지 않았다. 얼결에 마신 케냐 커피는 인당 25유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