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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모아 Sep 02. 2024

[13화] 민우 이야기 - 주변을 맴도는 누군가

<연재소설> 비밀의 부부

“키 큰··· 동양 남자?”


“응. 혹시나 해서 우리 모임 사진을 보여주니까 너랑 영진 씨를 짚더라. 처음엔 자기가 한 짓을 숨기려고 그냥 아무나 고른 게 아닌가 싶었어. 근데···”


“근데?”


“듀끌로 씨 키로는 우리 창문에 얼굴이 닿을 수가 없어.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비상구 계단 때문에 키가 180cm는 돼야 눈이 창에 닿아.”


듀끌로 씨가 본 사람은 내가 맞을 것이다.




유배달이 갑자기 사표를 내고 어학원에 나오지 않던 9월, 그는 진영이를 만나러 우리 집에 왔었고, 단둘이 테라스에서 차를 마셨다.


진영이는 그 얘기를 나에게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 아파트 주차장 바리케이드 앞에서 그의 차가 나가는 것을 보았고, 집에 와 보니 테라스 테이블에 찻잔이 두 개 놓여 있었으며, 진영이는 애써 밝은 척 고양이들과 놀고 있었지만 울어서 부은 얼굴이었다.


진영이에게 누가 왔었냐 물으니, 그녀는 집에 올 사람이 너밖에 더 있냐는 말을 대답이랍시고 했다. 그때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 유배달 때문에 우리 모두 어리둥절해하는 상황이었고, 그와 연락이 되냐고 서로 묻던 때였는데,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물을 때마다 곧 오지 않을까, 나야 모르지 하며 관심 없는 척 대답하던 그녀는 사실 몰래 유배달을 만나, 뭔지 모를 이유로 울기까지 한 것이다.


그날 이후 랭스 대학에 출강하는 날이면 점심시간이나 공강 시간에 몰래 집으로 돌아와 테라스 안쪽을, 안방 유리창을 지켜보다 돌아가곤 했다. 듀끌로 씨는 그런 나를 본 것일 테고, 사진 속에서 나를 정확히 짚어 내는 눈썰미라면 유배달도 봤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우리 집 욕실 앞을 기웃거린 적이 없으니 간유리 뒤의 놈은 유배달일 확률이 높다. 니콜라 집에 모였던 날, 어학원 학생이 유배달을 봤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렇다면 유배달은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고 여전히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말인가.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후 진영이는 수면제를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가 잠이 든 후 듀끌로 씨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만 유배달에 대한 이 지긋지긋한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진영이가 깨지 않도록 숙면에 좋은 음악을 틀어놓고, 위층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렸지만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반복해서 두드려도 대답이 없었다. 포기하고 계단을 내려오는 데 문이 스르륵 열렸고, 술에 취해 몸도 못 가누는 듀끌로 씨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다행히 옷은 입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비틀거리며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나는 다시 계단을 올라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가구가 하나도 없었다. 전등도 다 떼어 갔는지 무척 어두웠는데 아주 희미한 불빛만 부엌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불빛의 출처는 부엌 개수대 위에 매립된 초소형 등이었다. 부엌에도 싱크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거실 바닥에는 바나나 껍질과 먹다 만 감자 칩,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얼핏 보니 방 안에도 매트리스 하나만 바닥에 깔려 있는 듯했다. 


방 문고리에는 지난밤에 본 흰 고양이가 묶여 있었는데, 비쩍 마른 녀석이 나를 힘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학대받아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학대당한 것들의 상처. 


이 녀석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고작 반경 1m도 되지 않았고, 창살 없는 동그라미 감옥에는 배설물이 가득했다. 사람 먹을 것도 없는 집에 고양이 사료가 있을 리 없고, 녀석은 오랜 시간 먹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 그것은 듀끌로 씨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내 어린 시절을, 아니 나라는 인간 자체를 송두리째 망가뜨린 어머니에 대한 분노였다. 나의 감정을 읽은 듀끌로 씨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면 쥐를 사냥해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아시죠? 저희 유럽 사람들은 흑사병에 엄청난 트라우마가 있는 거.”


“그래서 묶어 뒀다고?”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놈의 태도를 참을 수 없다. 


나는 내가 이곳에 올라온 이유 따위는 잊어버린 채 이 더러운 학대범을 응징하기 위해, 내 가여운 어린 시절을 구해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이다. 술에 취한 듀끌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좀 솔직해지시지? 너는 지금 네 분을 힘없는 고양이한테 풀고 있는 거잖아!”


“그래. 내 아내와 아이들이 아끼던 녀석이라서 미웠어. 얼마나 급했으면, 얼마나 도망치고 싶었으면 이놈을 두고 갔을까. 하루하루 이놈이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렸겠지. 내가 돌아오기 전에 떠나야 했으니 그 마음은 또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 그렇게 사랑하며 아들이라 불렀던 놈을 버리고 갈 만큼 절실하게 날 떠나고 싶어 한 그 인간들!”


“그게 왜 이 고양이 잘못이야? 왜 얘가 벌을 받아야 하는데? 너희들이 싸우고 너희들이 헤어지면서 생긴 분을 어째서 이 녀석이 대신 받아야 하는데!”


나는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고양이의 목에 감긴 줄넘기를 풀어 그의 목에 감아 문고리에 묶어 버렸다. 


짐승처럼 울부짖던 듀클로가 숨을 못 쉬고 캑캑거린다. 그는 목에 감긴 줄을 풀으려 안간힘 썼지만, 술에 취해 쉽게 풀지 못했다.


“기분이 어때? 너도 이러고 있어. 이 캄캄한 방에서 하루고 이틀이고 아무것도 먹지 말고, 아무것도 마시지 말고, 똥오줌도 여기에 싸면서 있어 보라고!”


주방에서 새어 나오는 어두침침한 불빛.


쿰쿰한 고양이 오물 냄새.


바닥을 기며 흐느끼는 사람 소리.


내 앞의 그는 나였다.


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 그 다락에 갇혀 있다. 어느새 듀끌로가 줄넘기를 풀고 콜록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듀끌로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손이라도 쓸 수 있지.”


듀끌로는 땀과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나를 올려보았다.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려.”


내 말을 들은 듀끌로가 온몸을 뒤틀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줄넘기의 나무 손잡이 부분을 닦고 내가 만졌을 만한 것들을 닦은 후 그를 버려둔 채 현관으로 향했다. 고양이를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가구가 없어서 숨을 곳도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도망갈 수 있도록 창문만 열어두고 그 집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말 그가 죽어버리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아니다. 그가 걱정된다기보다 우리가 싸우는 소리를 누군가 들었을까 봐 염려됐다. 그가 오늘 일을 다른 이웃들에게 발설한다면 나와 진영이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미친 술주정뱅이가 하는 헛소리로 만들려면 적당한 알리바이가 있어야 한다.


집에 들어오니 음악이 여전히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고, 진영이도 자고 있었다. 또 악몽을 꾸는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조용히 흔들었다. 내가 계속 집에 있었다고 말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괜찮아?”


그녀가 잠에서 덜 깨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또 악몽 꾼 거야?”


“어디... 갔다 왔어?”


"갔다 오긴. 거실에 있었지."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머리맡에 놓인 물을 건넸다. 물을 받아 든 진영이의 손이 덜덜 떨린다.


“미안해. 나 때문에 또 못 자고 있었구나?”


밖에서 금요일 밤을 즐기는 사람들의 잡담 소리와 음악 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왔다. 


“아니. 저 소리 때문에 못 자고 있었어. 좀 나갔다 올게. 대체 어느 집인지 확인해서 내일 신고해야겠어.”


나는 밖으로 나가 우리 집 주변의 집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우리 윗집은 여전히 캄캄했고, 본채 건물도 불이 꺼진 집이 많았다. 음악 소리가 요란한 곳은 우리 앞 동의 4층이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웃고 떠들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각도 상, 그 집에서는 듀끌로의 집 안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때 윗집 창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올려다보니 내가 열어두고 나온 창이 닫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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