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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모아 Sep 04. 2024

[15화] 민우 이야기 - 불길함은 현실이 되고

<연재소설> 비밀의 부부

진영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내 기분을 살폈다.


술기운이 오른 건지, 담배 태우는 걸 보고 충격받은 건지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이 분위기를 빌어 한국에 같이 가자고 해야겠다.


“방학하면 같이 한국에 가자. 고양이들은 호텔에 맡기고.”


밝게 웃으며 재잘대던 진영이가 이내 조용해졌다. 설득이 쉽진 않겠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진영이를 데리고 갈 것이다.


“가서 집 팔려고. 리모델링해서 팔까 했는데 그냥 팔자. 어머니가 요양병원 들어가신 지도 반년이 넘었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실 것 같지도 않아. 이번에 집 팔아서 좋은 동네, 1층 아닌 데로 이사 가자.”


“다녀와.”


그녀는 나의 시선을 등지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같이 가면 좋겠어. 부동산도 같이 다니고. 서점도 가자. 출판사 미팅 때 네 소설도 가져가 보고.”


“집은··· 나 때문이면 팔지 마. 이담에 리모델링해서 팔아. 난 괜찮아.”


“한두 해 벌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어.”


“돈 다 뺏긴 거 나 때문이지?”


“내가 번 돈도 아니었는걸.”


할아버지는 내가 프랑스로 떠나오기 전, 내 이름으로 해 주신 모든 것들을 모조리 회수해 가셨다. 앞으로 단 한 푼도 없을 거라고 못 박으시면서.


“부잣집 도련님이 나 같은 여자 만나서 고생이다.”


“재미없다.”


“미안해. 발목 잡아서.”


“미안하면 같이 가.”


“······”


“가는 거지?”


“고양이 호텔에서 사고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데. 애들도 스트레스받고.”


“나는? 내 스트레스는 걱정 안 돼?”


“······”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정말 우리 결혼생활은 안중에도 없는 거야?”


“영진 씨라도 있었으면···”


“뭐?”


지금 이 순간 유배달이 떠올랐다고?  


“방문 탁묘를 부탁할 수 있잖아.”


게다가 걱정이 충만한 저 표정까지... 어이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그립냐?”


진영이가 눈과 입을 동그랗게 만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억울한 표정의 그녀를 보고 있자니 화가 났다.


기왕 유치해진 거 계속 가볼까?


그를 맘에 품고 있는 게 아니라면 왜 그가 주고 간 선물 앞에서 자꾸 허전한 웃음을 짓는지, 왜 핸드폰에서 눈을 못 떼고 내내 전화를 기다리는지, 유배달과 함께 한 시간 중 가장 나에게 말했어야 할 일은 왜 혼자 간직하고 있는지 따져 묻고 싶다.


내가 시작하면 그녀는 나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일부러 져 주지 않는 한 이제껏 단 한 번도 날 이긴 적 없기 때문이다. 이번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나를 꺾고 곤란하게 만들어주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다. 내가 공격하는 순간 그녀는 숨어있던 감정을 깨닫게 될 것이고 스스로 놀라 죄의식을 느끼며 나에게 사과할 것이다. 내가 받고 싶지 않은 그 사과를···


“왜 괜히 트집이야? 요즘 진짜 이상해. 병원 가봐. 심각하다.”


그녀는 한 번 더 억울해했고,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파트 주차장 바리케이드 앞에 도착했을 때 멀리 보이는 우리 건물 앞이 꽤나 부산스러웠다.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고 어쩌면 나와도 관련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뭐지?”


바리케이드가 열리기 전에 진영이가 차에서 내려 급히 건물로 뛰어갔다.


나도 차를 세우고 진영이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사체포를 실은 들것이 우리 건물에서 나와 앰뷸런스로 향하고 있다. 멀리 하얀 원피스 방진복을 입은 사람들도 건물에서 나오고 있다.


별채에는 우리와 듀끌로만 살고 있으니 저 사체포 안에는 듀끌로가 담겨 있을 것이다.


한꺼번에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점령해 버렸다.


혹시 나와 실랑이한 후 죽은 건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수건으로 내 흔적을 지운 것이 다행이다.


우리 레지던스를 담당하는 마담 레스프리가 진영이와 얘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마담 레스프리는 듀끌로가 자살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남아 있을 내 지문에 대해 방어해야겠다. 나는 나체로 돌아다니던 듀끌로가 괜찮은지 확인하러 위층에 한번 올라갔었고, 그때 그는 술이 많이 취해 있긴 했지만 크게 이상하거나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고 진술할 생각이다.


경찰이 하얗게 질린 진영이에게 듀끌로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진영이는 듀끌로 씨를 잘 아는 데 잘 모르겠다는 둥 횡설수설하고 있다. 사망 시점이 그녀를 얼게 만들었을 것이다. 얼른 다가가 내가 대신 대답했다.


“일주일 전 자정 너머 듀끌로 씨가 나체 상태로 복도를 돌아다녔습니다.”


나의 대답에 마담 레스프리가 놀라면서 소문이 사실이냐 되물었다. 안 그래도 듀끌로 씨가 종종 아랫도리를 벗은 채 창밖을 멍하게 내다보곤 했다면서.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 우리 건물 앞 동 3층 주민이었다는 말에 3층을 올려다보았다. 그날 밤 4층 집에서 파티가 있었던 것만 기억나고, 3층에 불이 켜져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듀끌로 씨가 어느 창문에 서 있었기에 보였다는 말인가? 각도 상 거실 쪽일 것이다. 우리가 몸싸움했던 곳은 주방 앞쪽부터 침실 문 앞까지였으니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두 남자가 허우적거리는 걸 본 이가 있을 수도 있다.


갑자기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마담 레스프리와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을 꼼꼼히 듣고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실은 일주일 전, 나체로 복도를 돌아다니는 듀끌로 씨를 본 후 걱정이 되더군요. 그분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 밤중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멍한 채 두리번거리는 진영이는 내 말을 통역해 주지 않았다. 다행히 경찰관 한 명이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 비틀대기에 부축해서 방에 있는 매트리스에 눕혀줬어요. 술병과 과자 부스러기 등이 널브러져 있긴 했지만 크게 이상한 점은 없었고, 곧 떠날 거라는 말을 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경찰관들이 다시 불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진영이는 마담 레스프리에게 윗집 고양이는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무리에서 떨어진 경찰관 한 명이 앞 동 주민들에게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곳으로 다가가 그들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들의 집에서 듀끌로 씨 집안이 보이는지,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 묻는 것 같은데 내 불어 수준으로는 앞 동 주민들의 대답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가 화장실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설왕설래 중인 것 같다.


집에 가구가 하나도 없으니 듀끌로처럼 키가 작은 사람은 끈을 천장에 매달 방법이 없다. 그러니 개수대가 있는 부엌이나 변기가 있는 화장실을 골랐을 것이다. 부엌은 개수대에서 조명 걸이까지 멀어서 탈락. 그는 화장실을 선택해서 변기를 밟고 올라가 목을 맸을 것이고, 마지막 순간 버둥대다가 조명걸이가 떨어지면서 도자기 세면대에 머리를 부딪친 후 바닥으로 추락했을 것이다.


그 집 화장실이 떠오른다.


눈이 아릴 정도로 진한 핑크색 벽지.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화장실 천장에 매달려 버둥대는 듀끌로의 다리도.


경찰관 주변으로 이웃 주민들이 모여들어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는 얘기가 오가는 듯했기 때문이다. 경찰관과 이웃 주민들이 하는 얘기를 빠짐없이 잘 들어야 하는데 통역해 줄 진영이가 사라지고 없다.


돌아보니 진영이가 비틀대며 아파트 본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쓰러질 듯 심하게 휘청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핑그르르 돌면서 바닥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혼절에 주변 사람들이 놀라 뒤로 물러섰고, 나는 단숨에 달려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곁에 있던 경찰관이 앰뷸런스로 가 응급 요원을 불러왔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진영이는 눈을 떴고 정신도 돌아왔다. 따라 들어온 응급의가 몇 가지 질문을 했고, 그녀는 식사 중 마신 와인 탓인지, 급히 먹은 음식 탓인지 계속 어지럽고 메슥거렸었다고 대답했다. 응급의는 간단히 청진하고 복부를 눌러보더니 따뜻한 물을 충분히 마시고 쉬라는 말만 하고 자리를 떠났다.


어둠이 내릴 즈음 어수선하던 아파트 앞뜰이 조용해졌다.


건물을 진동하는 악취를 빼기 위해 건물 입구를 열어놓았고, 그 덕에 현관문 틈으로 칼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바람과 함께 악취도 묻어 들어왔다.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냄새였다.


먹은 것도 없는데 진영이는 밤새 구토했다. 맥을 못 추는 진영이 옆으로 고양이 세 마리가 모여들어 측은하게 바라보다, 혀로 얼굴을 핥다, 앞발로 온몸을 꾹꾹 누르며 응원인지 애교인지 지극 정성이다. 나는 감히 끼어들 틈도 없다. 이 맛에 녀석들을 키우나 보다.


해가 뜨자 락스 냄새가 건물에 진동했다. 문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없었다. 집에 머무는 냄새를 빼려 문을 열면 새로운 냄새가 범람해 들어왔다. 열면 여는 대로 닫으면 닫는 대로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냄새 때문에 물도 못 넘기고 누워만 있는 진영이가 걱정되어 며칠간 시내 호텔에 가 있자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은 안 하지만 고양이들을 두고 갈 수 없기 때문임을 잘 안다.


진영이는 먹이 주는 것도 잊었는지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잊은 것이 아니라 그냥 다 같이 죽어버리려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양이 이름이 쓰여있는 전용 그릇에 사료를 담았다. 어느 정도 줘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한주먹씩 대충 담았다. 잠시 망설이다 핸드폰으로 하루에 필요한 양과 횟수를 검색해 보았다. 체중의 2~3%를 2회나 3회에 나누어 주라고 나와 있다. 변 상태를 보면서 사료량을 체크하라는데··· 체중을 재려고 한 마리씩 안고 체중계에 올라가려는데, 나를 경계하며 도망 다니는 통에 그것도 쉽지 않았다. 아기 때는 제법 잘 왔었는데. 녀석들을 유도하려고 간식을 꺼냈더니 이번에는 세 놈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지조 없는 것들.


고양이들이 간식을 더 달라며 내 주변을 맴돌다 다리에 머리를 대고 비비적대기에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냥 별 뜻 없이 한 거였는데 내 마음을 오해하고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뭘 더 어째야 할지 몰라 그냥 간식을 더 주었다.


이날부터였나? 고양이들이 자주 내 주변을 얼쩡거리고 누워있는 내 배 위로 올라오기까지 했다. 어느새 나는 고양이와 친해지는 법, 고양이 쓰다듬는 법 등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듀끌로의 시신이 발견된 지 사흘째 되는 날, 쌀을 씻어 죽을 끓였다. 진영이가 크루아상과 우유, 과일은 입도 못 대니 메뉴를 변경해야 했다.


냉장고에 뭐가 있나 보았다. 당근, 호박, 브로콜리··· 채소를 꺼내는 데 냉장고에 붙어 있는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고양이 생식 재료와 냉동고에 남은 재고 현황을 적은 리스트였다. 닭가슴살과 셀러리, 황태, 버섯, 바나나, 토마토, 당근, 블루베리, 단호박, 고구마, 연근, 애호박··· 청국장에 들깻가루, 녹차 가루, 비타민, 인산 등 안 들어가는 것이 없다. 나는 입에도 못 대본 것들이다. 마음이 빈곤해져서 죽이고 뭐고 끓이지 말까 하다가 그냥 맘을 넓게 쓰기로 했다.


채소를 씻고, 털고, 썰다 보니 주방이 엉망이 되었다. 잘게 썬다고 썰었는데 사 먹는 죽에 들어 있는 채소와 비교하면 턱없이 큰 조각이다.


채소를 썰다 포기하고 그냥 흰 죽을 끓였다.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하나 기름을 부어야 하나... 하나하나 난관이었다. 인터넷이 없었으면 이것도 못 할 뻔했다.


진영이는 다행히 죽은 마다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잘 끓였냐는 둥 칭찬까지 하며 먹다가 몇 술 채 못 뜨고 다시 토악질을 시작했다. 거식증도 아니고 왜 저러는지 알 길이 없다. 노란 위액까지 게워낸 후 지쳐서 벽에 기대앉아 있는 진영이에게 따듯한 물을 건네고 집을 나섰다.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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