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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모아 Sep 05. 2024

[16화] 민우 이야기 - 미심쩍은 유배달의 행적

<연재소설> 비밀의 부부

막상 집을 나섰지만, 어학원 외에는 갈 곳이 없다.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은 술 생각이 간절하다.               


어학원으로 향하면서 희경 씨에게 전화 걸었다. 진영이의 상태를 전하자 그녀는 흔쾌히 우리 집에 가보겠다고 했다.               


어학원에 도착하니 미선 선배가 있었다. 미선 선배는 나를 보자 눈이 동그래졌다.               


“웬일이냐. 일 없는 날에 여기를 다 오고?”               


미선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퇴근 시간이 되려면 한참 남은 시간이었다. 술 얘기를 할 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차 한잔 가능해?”    

           

“잘됐다. 나도 온라인 강의랑 유튜브 운영 문제로 상의할 게 있었는데.”   

            

미선 선배가 내온 커피의 향이 독특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향을 맡으며 고개를 갸웃하자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리쉬 커피야. 오늘은 이 분위기 같아서.”               


나는 피식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럼의 향이 커피 을 압살 해버린 괴상한 맛.               


“커피 맛이 하나도 안 나.”               


이번엔 미선 선배가 웃었다.               


“온라인 강의는 아무래도 네가 적임자야. 강의 경력도 길고 소설가라는 이력도 홍보에 좋고.”               


“······”               


“너도 네 글 홍보되고 좋잖아?”     

          

“그럼 오프라인 강의는 빼줘.”     

          

“안돼. 너보고 등록하는 학생이 많아. 지금처럼 조금만 해.”   

            

“······”               


“너 글 쓰는 시간 최대한 존중해서 일정 조정해 주고 있잖아. 이런 일터를 어디서 구하니?”               


“내 득 본 것도 많잖아?”               


“그러게. 한 번 등록한 애들은 너 보려고 그만두질 않으니.”               


“강사는 구했어?”               


“수업이 많은 게 아니니 막상 뽑기가 그래. 한국에서 데려오려면 정착금도 따로 줘야 하고, 여러모로 일이 많아서 여기서 찾으려는데. 진영인 안 한다지? 전공도 맞고 언어영역 강의한 이력도 길고. 진영이가 하면 딱 좋은데.”               


“일할 상황이 아니긴 해.”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듀끌로가 죽은 사실에 대해 선배는 적잖이 놀랐다.               


“진영이 성격에 자책하고도 남겠네. 어쩌냐? 한국 갈 수 있겠어? 진영이 혼자 3주나 두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그래서 안 갈까 해. 진영이 표도 사뒀는데. 고양이들 두고는 안 가겠지.”               


“미안하다. 내가 봐주면 좋은데 털 알레르기가 너무 심해서 난 근처도 못 가니.”               


“난 왜 그런 알레르기 하나 없나 몰라.”               


자고 있는 내 배 위로 폴짝 뛰어올라 앞발로 얼굴을 툭툭 건드리던 햇님이가 떠올랐다. TV를 보는 내 무릎 위로 은근슬쩍 올라와 앉던 별님이와 간식 통 앞에서 시위하던 달님이도 떠올랐다. 알레르기가 있었다면 이런 재미는 없었겠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드디어 나도 미쳐가는구나, 정신 차리자, 마음을 가다듬고 머릿속에서 어슬렁대는 고양이들을 몰아내 버렸다.               


“참, 나 유영진에 대해 이상한 얘기 들었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온몸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었다. 언제 들어도 듣기 싫은 이름이다. 나는 그에 대한 얘기라면 별로 듣고 싶지 않아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재불 입양한인회에서 봉사활동 하는 내 친구가 영진 씨를 추천했었잖아? 며칠 전에 그 친구를 만났는데, 올여름에 영진 씨가 한국에 간 게 생부가 위독해서 간 거였다는 거야."

              

“생부라니? 생부모 못 찾았다며?”  

             

“그러니까!”  

             

“······”               


“근데 그 친구 말로는 작년 여름에 이미 생부를 찾았다더라고.”               


“작년 여름? 그럼 우리 어학원에 들어오기 전?”               


“그렇지. 여기서 일 시작한 게 작년 12월쯤이니까.”               


“그럼 거짓말은 왜 한 거지?”               


“글쎄. 가정사 얘기는 피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얘기하기 싫으면 나한테 했듯이 그냥 어깨나 으쓱해 보이면 될 걸 디테일을 살린 거짓말은 왜 하냔 말이다.

              

“사실 완전히 거짓말을 아니야. 생모는 못 찾았으니까.”               


진실이 조금 남아 있더라도 거짓말은 결국 거짓말이다. 그리고 모든 거짓말에는 숨은 의도가 있고, 상대방에게 들키면 안 되는 실이 있다. 그게 대체 뭘까.               


“게다가 더 이상한 건···”


“이상한 건?”                


미선 선배는 궁금해하는 내 얼굴을 보며 말을 망설이기 시작했다.                   


“아니다.”    

           

“이럴 거야?”               


“뭐 별일은 아니야.”               


계속 뜸 들이는 걸 보니 내가 꼭 알아야 할 내용인 것 같다.               


“나랑 관련 있군?”               


“······”               


“정말 말 안 해 줄 거야?”               


“여기 오기 전부터 널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아니. 너 때문에 여기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자세히 얘기해 봐.”               


“어제 인사 담당자가 전화로 유 선생이 그만둔 이유를 묻는 거야. 원래 영진 씨를 파리로 배치하려고 했었는데 박민우 작가 팬이라 지원했다면서 반드시 너랑 같은 지역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대. 여기는 수업이 적어서 어차피 파리로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데도 굳이 랭스에 집을 구해달라고 했대. 그랬던 사람이 왜 그렇게 금방 그만둔 거냐고 혹시 너랑 문제가 있었냐고 물었어.”        

       

유배달이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니. 뜻밖의 사실에 나는 잠시 멍해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우리에게 접근해서 주위를 맴돌고, 정성스레 거짓말하며 굳이 영진이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한여름 밤 진영이만 있는 집에 불쑥 찾아와 생부모를 못 찾아서 상심한 척 연기한 것이 된다.    

           

그의 거짓말은 나에게, 아니 진영이에게 다가가기 위한 것임이 틀림없다. 왜? 도대체 왜?   

            

욕실 창 안을 엿보던 놈이 정말 유배달이었을까?     

          

듀끌로가 진영이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보면 그가 유배달을 본 건 확실하다. 그에게 욕실 창 뒤에 서 있던 사람이 유배달이었는지 확인했어야 했는데 흥분해서 날뛰다가 기회를 영영 놓쳐버렸다.

             

“그 얘길 왜 지금에야 하는 거야?”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듣기에 따라 공격적으로 들릴만한 어조였다. 미선 선배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어제 전화받았거든? 그 얘기 듣고 너 보자마자 얘기하는 거고?”

              

“······.”       

        

“근데. 너를 찾아 여기로 온 거라면 왜 진영이를···”               


미선 선배는 말을 하려다 말고 내 눈치를 살폈다.               


진영이를 바라보던 유배달의 눈빛, 애틋한 표정.               


그 모습을 본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선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지만 모르는 척하고 싶다. 유배달과 진영이의 미심쩍은 관계를 공론화하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순간 유배달이 우리 세 쌍둥이에 대해 아는 것 같다고 한 진영이 말이 떠올랐다.               


“선배, 혹시 우리 세 쌍둥이 얘기했어?”               


“누구한테? 유 선생한테?”               


“응.”               


“절대 안 하지. 그 얘기 진영이가 싫어하는 거 뻔히 아는데.”               


“그럼 어떻게 안 거지?”               


“누가 알아? 영진 씨?”               


“응. 그런 것 같아.”               


“그런 것 같다니?”               


“그냥 느낌이야.”               


“느낌이라도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유배달과 진영이가 단둘이 있었던 밤에 대해 말할 수는 없으니 말을 돌려야 한다.               


“혹시 유배달이 있었던 보육원 이름이나 입양기관 이름 알아?”               


“홀트였던 것 같아. 보답으로 거기서 번역 봉사한다고 들었거든.”               


“선배. 부탁 좀 하자. 유배달 이력서 좀 보여줘.”               


“야! 개인정보 유출이 얼마나 위험한 건대!”               


“나 이 회사 10년 넘게 다닌 직원이야. 직원이 다른 직원 정보 좀 보는 게 뭐 대수라고 이래? 그리고 인사과에서도 내가 어디 사는지 나한테 묻지도 않고 유배달한테 알려준 거, 그거야말로 개인정보 유출 아닌가? 게다가 이력서에 쓰는 내용이 뭐 별 거긴 해? 세 다리 건너면 나도 금세 알아낼 수 있는 내용이야.”               


“아니, 그래도···”               


“굳이 날 고생시켜야겠다면 할 수 없고.”               


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숨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선 선배가 눈을 흘기며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컴퓨터로 향하는 그녀의 등 뒤로 자기소개서도 프린트해 오라고 말했다.    


                     

 *

            

희경이 왔다 간 후 진영이는 감쪽같이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신기한 일이었다. 몇 날 며칠 물 한 모금 못 먹던 사람이 갑자기 밥도 잘 먹고, 집안일과 고양이 돌보는 데에도 열정을 쏟았다. 물론 나를 위한 음식에도 힘을 쏟기 시작했다. 열심히 하는 마음만 받고 결과물은 사양하고 싶은데 마땅한 핑곗거리가 없다.               


고양이들은 진영이 음식이 맛있나? 사료를 먹을 때 보다 진영이가 만든 생식을 더 잘 먹는 것이 무척 신기하다.               


나를 고양이로 생각하는 건지 진영이는 내 음식을 만들 때도 소금을 넣지 않았다. 처음에는 건강을 생각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고양이 생식을 만드는 습관으로 간 하는 과정을 까먹고 안 하는 것 같다. 익히는 걸 까먹지 않은 게 다행이다.               


유배달이 왜 우리에게 접근했는지 아무리 고민해도 도통 알 수가 없다. 나를 괴롭힐 목적으로 진영이를 이용하려는 건지, 진영이를 찾기 위해 나를 이용한 건지조차 모르겠다. 거짓말까지 하며 접근한 것이니 원한 때문일 수도 있다.               


내 소설을 싫어하는 독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웹에 올라온 모든 댓글을 찾아보고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블로그까지 찾아가 살펴보았다. 어디에서도 유배달과 연관되는 단서는 없었다.               


혹시 예전에 진영이를 괴롭히던 양우석과 유배달이 관련 있는 건가. 설마 그 깡패새끼가 아직 살아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단단히 복수하러 온 걸 텐데···   

            

유배달은 살부터  프랑스에서만 살다가 성인이 된 후 2년간 한국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 2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온 걸까.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은 그 깡패새끼 밖에 없다.    

           

그놈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그의 행방을 끝까지 확인하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아니면 어머니가 나를 서서히 말려 죽일 목적으로 유배달을 보낸 건가?


할아버지일 수도 있다. 우리 부부를 갈라놓으려고 유배달을 고용해서 진영이를 유혹하라고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의심스럽다.               


가장 이상한 건 계획적으로 접근한 게 분명한데 그냥 싱겁게 떠나버린 것이다.               


진영이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갑작스레 떠날 만큼 진영이와 깊은 정을 나눈 건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 이미 목표를 이룬 건지.  

             

혹시 떠난 척하며 우리 주변을 맴돌다 그에 대한 진영이의 그리움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다시 나타나서 진영이를 흔들려는 걸 수도 있다.         

      

유배달에 대해 알아야 한다.    

           

당하더라도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할 수는 없다.

              

여기서 혼자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 모든 의혹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한국에 가야 한다.        

       

막상 한국에 가려니 진영이가 걸린다. 이미 몸을 추스르고 혼자 지내도 될 만큼 회복했지만 언제 다시 불안증이 시작될지 모르고, 내가 없는 틈에 유배달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이 목적이라면, 진영이를 원하는 척 접근했다가 해칠 수도 있다. 그냥 단순히 진영이와 유배달이 서로를 맘에 두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오히려 맘 편했다.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산란하니 감정 컨트롤이 힘들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내가 나 같지 않고 감당이 안 된다.      

         

이렇게 마음의 평정심을 잃은 이유가 뭘까?     

          

상대가 누구인지, 왜 이러는 건지, 언제 다시 나타날지 등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과 원한의 상대는 나인데 진영이가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진영이를 설득해서 한국에 같이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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