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이가 먹이 그릇을 흰둥이 앞에 갖다 주며 우리 집은 사료와 생식을 함께 먹는다, 동생들처럼 둘 다 잘 먹어야 한다, 안 그러면 엄마가 혼내줄 거다 이러고 있었다.아무래도 은근슬쩍 저 녀석까지 우리 집에 편입시키려는 요량인 듯하다.
나는 이제 진영이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그녀는 나를 뺀 다른 것들로 인생을 차곡차곡 채우고 있다.
아이를 다시 갖겠다고 근 3년 가까이 나를 들들 볶으며 정자은행 취급하더니 이제는 고양이 집에 얹혀사는 천덕꾸러기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자식도 필요 없고 가족도, 돈도 필요 없다 선언하고 떠나왔는데 그녀는 왜 나 하나로는 안 되는 걸까. 왜 끝없이 다른 무언가를 찾아 헤매며 나를 밀어내는 걸까.
“얘가 왜 우리 거실에 있어?”
“아침에 우리 집 베란다에서 물을 마시고 갑자기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안 나가네.”
“그래서?”
“한겨울이야. 집고양이가 밖에서 지내기 힘든 날씨라고. 매일 비도 오는데.”
나는 지금 윗집 고양이 신세까지 돌아볼 여력이 없다.
진영이가 이렇게 고양이에게 집착하게 된 이유는 제대로 품어보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던 아이들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건 분명 내 잘못이다.
나는 그냥 진영이도 내 마음과 같을 거로 예상했고 서로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겠거니 했는데, 이미 폭발적으로 증가해 버린 모성애는 자식에게만 쏟아낼 수 있고, 진영이 같이 쏟아낼 대상을 잃은 어미는 새로운 대상을 찾아야만 이 감정이 해소되나 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이가 필요하다. 그 세상은 나와 진영이가 함께 만들고 공존할 수 있을 테니까.
세쌍둥이도 결혼 후 자연적으로 생겼으니 무모한 계획은 아니다. 진영이가 기를 쓰던 3년 동안 대충 장단만 맞추고 시간을 허비한 것이 못내 후회스럽긴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사실 그때는 사랑이 너무 버거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인생이 고달파진다고 생각하던 때라 진영이 하나로 만족하자 결론 내렸었다. 하지만 이제막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진영이의 손을 끌고 방으로 향했다.
"왜 이래?"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제안하라며?"
"뭐 하는 거야?"
"이제 하자는 대로 다 할게. 네가 시키는 거 군소리 없이 다 한다고. 다시 노력해 보자. 병원에 가자면 갈 거고, 뭐든 협조할게."
진영이는 방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내 손을 우악스럽게 뿌리쳤다.
"협조? 항상 이런 식이야. 같이 원해서 하는 게 아니고 넌 늘 나에게 베풀고 도와주고 참아주는 사람이지? 좋아서 함께 하는 건 하나도 없지?"
"그게 아니잖아! 난 그냥 너만으로도···"
나는 이번에도 말을 맺지 못했다.
“너한테는 아이가 필수인 것 같으니까 한 말이야!”
다시 노력해 보자고, 이제 뭐든 군소리 없이 다 할 것이고, 임신을 위해서라면 정해주는 식단대로 먹고, 배란일에 핑계 대고 사라지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진영이는 나를 완강히 뿌리치며 화를 냈다. 진심으로 원하는 맘 없이 또 그냥 노력하는 척 흉내만 내는 거로 보는 듯했다. 진영이 벌게진 얼굴로 대꾸했다.
“넌 아직도 내가 아이를 원해서 시술했다고 생각하는구나?”
또 다른 차원의 아리송한 논쟁이 시작되려나 보다.
“그럼? 아니야?”
“나 대신 애들이 벌 받은 거잖아. 나 때문에 뺏긴 생명이니까 내가 다시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뭐?”
“엄마 될 자격이 없으니까 아이들이 그렇게 된 거라고!”
나는 세상의 모든 단어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냥 죽게 놔두지. 그랬으면 나 하나로 끝났을 텐데.”
도대체 진영이 죄책감의 발원지는 무엇일까?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건 과거에도 한 번 있었다.
9년 전, 병원에서 퇴원한 진영이는 양우석이라는 깡패 새끼가 다시 찾아올까 봐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안해했고 살려는 의지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무기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사람처럼 미친 듯이 일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고, 내 옆집으로 이사했다.
옆집에 살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와 내 안부를 체크하고 시답잖은 얘기를 조잘대다 저녁이든 야식이든 먹고 갔다. 밤늦게 퇴근하는 날도 어김없이. 그러던 어느 늦은 밤, 식당에서 국밥을 먹다가 뜬금없이 사귀어 보자고 했다.
“사귀자고?”
“응.”
“너랑 나?”
진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네 옆에 있어 줘야겠어.”
“고백 치고 신박하다?”
왜 또 장난질인가 싶어서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진지하게 대답해 줘.”
초조해 보이는 표정. 장난이 아니었다.
“뭐야, 왜 그러는 거야?”
“뭘 왜 그래? 알고 있었잖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나는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가늠할 수 없어서 눈만 끔뻑거렸다.
“오래전에 끝난 줄 알았지.”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면 그저께는 왜 가만히 있었어?”
“그저께?”
“설마 내가 기억 못 할 만큼 취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진영이가 말한 ‘그저께’란, 술에 잔뜩 취한 그녀가 나더러 택시비를 가지고 내려오랬던 날인데 나는 뻔한 핑계인 걸 알면서도 군말 없이 내려갔었다.
택시가 떠나자마자 몸도 못 가누며 휘청대던 그녀는 고맙다는 말 대신 내게 진한 키스만 남기고 자기 집으로 홀랑 들어가 버렸었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걸 알아서 그냥 내버려 둔 거 아니었어?”
‘네 맘이 아니라 내 맘 때문이었어.’
나는 사실대로 말해 주기 싫어서 입을 다물었다.
“왜 안 밀어냈었냐고.”
“내 맘이야.”
진영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는 기분 내키면 아무하고 키스할 수 있는 사람인 걸 깜빡했다.”
“너도 술김에 그랬으니까 같은 거 아닌가?”
“아니. 난 계획하고 했던 거야. 술의 힘을 빌려야 해서 취하도록 마셨던 거고.”
“... 왜?”
“우리가 사귈 수 있을지 확인해 봐야 했으니까.”
“미리 간까지 보셨다?”
“용기 내서 키스하고 사귀자고 말하는 여자한테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
“너 숙제하는 사람처럼 보여. 느닷없이 왜 이래? 너답지 않아.”
내 대답에 진영이가 왼손 약지에 남은 화상 자국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 보고 연락 줘.”
쌩하니 나가려는 진영이의 손을 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밥 좀 먹고. 응?”
왜 이러는 건지, 무슨 의도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극도로 불안해하던 사람이 별다른 확신 없이 갑자기 안정을 찾은 것도 이상했는데, 1년 만에 끔찍한 과거를 잊고 나에게 사귀자고 하는 건 대단히 진영이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천천히 국밥을 먹었다.
말없이 기다리던 진영이가 나의 의도를 눈치채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았다. 흠칫 놀란 진영이가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람 좀 쐬자.”
나는 진영이를 데리고 한적한 공원 벤치로 갔다.
겨울바람이 무척 쌀쌀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물어봐야 하나, 혹시 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머리가 복잡한데 진영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널 너무 곤란하게 했나 보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뻔뻔한...”
나는 벌떡 일어나 진영이를 와락 안았다. 그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문득 그녀가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든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 내줘서 고마워. 아주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라서 잠깐 당황했을 뿐이야. 왜 이렇게 급하게 결심한 걸까, 너한테 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스럽고 머리가 복잡해서 바로 대답 못 했어.”
진영이는 놀랐는지 대답이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네 선택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았거든.”
“......”
“네가 준비되길 기다렸다고.”
진영이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묘하게 슬퍼 보였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마음먹은 이상, 난 이제 조심하지 않을 거고, 거침없어질 거야. 괜찮지?”
희미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는 진영이를 꼭 안았다. 잠시 안겨 있던 그녀가 나를 올려보았다.
“키스해도 돼?”
“그럼.”
내가 빙그레 웃자, 그녀가 발꿈치를 들어 내 입술에 뽀뽀를 쪽 했다. '그저께'와는 확연이 다른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난 제대로 한다?”
내 말에 뺨이 발그레해진 진영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고, 나는 곧바로 답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인데 기쁘지만은 않았다. 행복한 동시에 불안하기도 한 속내를 들킬까 봐 나는 그녀를 더욱 꼭 안았었다.
왜 갑자기 그날의 불안감이 떠올랐을까.
엄마가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쩐지 나를 향한 원망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바탕 난리를 치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살면서 이 정도로 언성을 높이고 화낸 적은 처음이다.
내 마음속에 이렇게 많은 울분이 쌓여 있었나? 아이들을 하나씩 보내야 했을 때도 잘 참고 견뎠었는데······ 그것이 이제야 터져 나오는 건지 나는 진영이에게 헤어지자는 둥 내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이런 협박이 과연 통하기나 할지, 진영이가 옳다구나 헤어지자 하지는 않을지 불안하다.
다행히 흰둥이는 더 이상 우리 집에서 볼 수 없었다. 나는 진영이눈치만 보며 그녀의 입에서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말이 나올까 봐 한국에 가자는 제안도 못 한 채 며칠째 마음만 졸이고 있다.
“아직 말도 못 꺼냈나 보군?”
전자 항공 티켓을 보고 있는 나에게 미선 선배가 말을 걸었다.
“그냥 프린트해서 식탁 위에 올려 둬. 스스로 보게.”
꽤 괜찮은 생각 같다.
“내일 밤 비행기랬나?”
“응.”
선배가 종이 한 장을 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올 때 이거 다 사 오셔.”
종이에는 한국에서 사 올 물건들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보아하니 전부 파리에서 살 수 있는 것들이다. 개중에는 뭐 이런 것까지 사 오라 하나 싶은 것도 있었다.
“내가 선배 스타킹까지 사 들고 와야 해?”
선배가 종이를 홱 가져가더니 뭔가를 더 적어 내 앞에 다시 내려놓았다.
“오징어젓, 명란젓? 이거 다 파리 한인 마트에서 팔잖아.”
나는 빨간 펜을 들고 한인 마트에서 살 수 있는 품목들을 지워 버렸다.
“어! 지우지 마! 다 사와! 지금 프랑스 전역이 대중교통 총파업으로 난리야. 파리 가는 기차도 없다고. 게다가 파리 안에서도 10분이면 갈 곳을 3시간씩 걸려서 간대.”
나는 목록의 물품을 종류별로 나누기 시작했다. 쇼핑 시간을 줄이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나더러 팬티도 사 오라는 거야? 이건 안 되겠어. 내 한국 주소 줄 테니 온라인으로 주문해. 배송되면 가지고는 올게.”
“너, 진영이한테 이르지 마라. 기분 나쁠 테니까.”
“이게 뭐라고 기분이 나빠?”
선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뜬금없는 침묵이 이상해서 고개를 드니 선배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넌 왜 그리 뭘 몰라?”
“뭐?”
“연애 많이 했었다는 거 다 뻥이지?”
그녀는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서 종이를 채 갔다.
“다른 여자가 이런 걸 부탁하면 됐다 해야지. 야멸차게 거절해야지. 특히 진영이 같이 섬세하고 예민한 마누라랑 사는 남자라면.”
선배가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는 놀라 쓰레기통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했다.
“예민은··· 세상에 그렇게 눈치 없는 여자는 본 적이 없구먼.”
“너에 대해선 예민하잖아. 의심도 많을걸?”
어떻게 저렇게 잘 알까 깜짝 놀랐다. 놀란 나를 보며 선배는 말을 계속 이었다.
“너 혹시 바람피우다 걸린 적 있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잠시 멍해 있었다.
“술 마셨어? 뭐야, 지금?”
“아니면 진영이가 왜 그렇게 너한테 자신이 없는 거지?”
갑자기 진영이 왼손 약지에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화상 자국이 떠오른다.
미선 선배는 불쾌해하는 내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하긴. 사람들이 너희 둘을 대놓고 저울질할 테니... 그걸 진영이가 모를 리가 없지.”
“가야겠다.”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자격지심 때문이겠네.”
“나 3주 뒤에 오는 거 알지?”
선배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책상을 정리하고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너 왜 진영이한테 한 번도 사랑한다고 안 했어?”
또다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건 당사자한테도 추궁당한 적 없는 질문이다. 이렇게 사적인 질문을 받게 될 줄이야. 이 물음에 대답할 의향은 전혀 없지만,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아야 했고, 선배의 무례함에 제동 걸 필요는 있다고 느꼈다.
나는 다시 내 책상으로 돌아와 가방을 세게 내려놓고 선배를 쏘아보았다. 선배는 내 기분 따위는 개의치 않고 비난을 이어갔다.
“나한테 그러더라. 자기를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라서 네가 힘들 거라고. 그 말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어떻게 부인이 그런 생각을 하게 둘 수가 있어?”
미선 선배는 단단히 작정한 사람처럼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생판 남에게 왜 이런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로 표현을 안 한 건 사실이기에 마땅히 받아칠 말이 없다.
사실 진영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것도 충격이었지만 이런 사적인 얘기를 미선 선배에게 했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둘이 그렇게 친해?”
“내가 보기엔 네가 훨씬 진영이를 아끼는데. 진영이는 전혀 못 느끼는 게 이상해. 자기만 널 잡고 산다고 생각하고 있어.”
“나 참, 뭘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거야? 자기 하나 생각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네가 한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더라. 책임감일 뿐 사랑은 아니래.”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행동으로 마음을 다 보여주고 있는데 왜 느끼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작정하고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면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데.
“때로는 말로 해야 비로소 느껴질 때가 있어.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젊은 애가 왜 사랑한다, 소중하다 말을 못 해?”
대소변 냄새가 진동하는 어두운 다락방에서 엄마 사랑해요, 앞으로는 잘할게요, 착한 아들이 될게요를 외치며 기어 다니던 때가 떠오른다. 나는 대구로 내려간 후로 두 번 다시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내게 사랑한다는 말은 고백이 아닌 구걸이다.
“진영이 같은 아내에게 필요한 건 사랑한다는 표현이야. 엄청나게 표현해 줘야 해. 안 그러면 너흰 가망 없어. 진영이는 계속 자기가 필요한 곳, 자기에게 사랑을 표현해 주는 대상을 찾아 헤맬 거고 너는 더욱 소외될 거야.”
사랑을 표현해 주는 대상이라··· 분명히 유배달을 염두하고 한 말인 걸 알지만 이 얘기는 차마 꺼내고 싶지 않다.
“그게 고양이라는 거야?”
“그렇게 생각해?”
“내가 묻잖아.”
“그럴 수도 있고. 근데 난 왜 고양이들은 그냥 핑계인 것 같지?”
“뭐?”
“진영이가 고양이를 진심으로 위하는 건 맞는데, 뭐랄까··· 고양이들은 그냥 좀 수단 같은 느낌이랄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선배가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너희 관계를 위한 장치 같은 거지. 관계를 위태롭게도 하지만 유지해 주기도 하는 장치.”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네."
"내가 아는 김진영은 네가 싫어하는 걸 자기 욕심 챙기자고 악착같이 우기며 할 사람이 아니거든. 아니야?"
"......"
"너와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잖아."
"그럼 왜..."
"나도 모르지. 물어보면 아마 자기도 모를걸?"
"......"
"그냥 가끔 되게 부자연스러워 보일 때가 있어. 소중해서 꽉 쥐고 있는 건 고양이가 아니라 너 같은데 왜 저럴까."
우리 부부의 문제가 이렇게나 많고 훤히 다 보인다는 말인가? 나는 나보다 더 많은 걸 꿰뚫고 있는 선배의 말에 상당히 충격받았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 나에게 선배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처럼 외모가 으리으리한 남자가 남편이라면 나라도 그럴 것 같긴 해.”
선배의 말에 피식 웃어 버렸지만, 머릿속은 이미 얼어붙었다.
진영이에게 자격지심이 있다면 그건 선배가 추측하는 것처럼 내 외모 같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진영이에게 내 마음을 더 많이, 더 자주 표현해야 한다는 걸 잘 알지만, 말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으로 표현해 왔다. 말로만 못 했을 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보여주고 있는데 전달되지 않았다니.
“너한테 대체 어떤 우물이 있기에 이렇게 감추는 걸까?”
“······”
“썩은 물이 고인 우물은 막아 버려. 안 그러면 진영이가 빠질 수 있어.”
알몸으로 서 있는 기분. 모조리 다 들켜버린 느낌.
“뭘 다 아는 것처럼 그래?”
“잘못짚은 거면 미안!”
미선 선배는 눈을 찡긋하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더 있다가는 정신이 다 털릴 것 같아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럼 오징어젓 심부름은 야멸차게 거절하겠음.”
“뭘 또 야박하게 그러냐? 스타킹, 팬티는 빼도 젓갈은 좀 사 오지?”
가방을 챙겨 나가는 내 뒤로 선배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네가 우리 어학원에서 일한 지 십 년이 넘었고, 세 쌍둥이 낳은 걸 아는 직원들도 꽤 남아 있으니 그 얘긴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어. 유 선생이 그 사실을 아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거지.”
“그럼 나를 찾아 일부러 여기로 온 건? 게다가 이미 생부를 찾았으면서 못 찾았다 하고, 그 이유로 유영진으로 개명했다는 거짓말은? 그것도 이상한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