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이 된 딸아이는 올해 선생님이 무섭다는 말을 자주 한다.
3학년 선생님은 무서울 수 있다. 하지만 아이는 평생 처음 만난 무서운 선생님에게 아직도 적응 중이다.
그동안 나는 단 한 번도 3, 4학년을 맡아보지 못했다. 요즘은 여러 이유로 아니긴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3, 4학년은 꿀학년이었다.
1, 2학년은 천둥벌거숭이라 힘들고, 5, 6학년은 자기들이 어른인 줄 알고 개겨대서 힘들다.
비교적 3, 4학년은 학교 규칙도 잘 지키면서 선생님 말씀도 잘 듣는, 한마디로 "편한 학년"이라는 인식이 있다.
나는 실경력이 10년이 넘지만 한 번도 3, 4학년을 맡아보지 못했다. 감히 꿀학년을 넘보는 자 누구냐. 대체로 3학년은 내정되어 있었고, 선배교사들이 먼저 하겠다고 하시면 양보해야 하고, 아니면 학교에서 모두가 맡기 싫어하는 큰 업무를 주면서 덤으로 3학년 할래? 하면서 서비스로 주는 학년. 내가 유독 작은 학교에 있어서 티오가 많지도 않았고.
엄청 큰 업무 따위는 나에게 잘 오지도 않았고, 나름 기피 업무를 맡아본 적은 있지만 그해에는 웬일인지 5학년이었다. 관리자에게 뭔가 굉장히 잘 못 보인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3, 4학년을 해보고 싶으면서도 한 번도 안 해본 학년이라 막상 두렵기도 하다.
내가 본 학교에서는 주로 3, 4학년에 엄격하고 아이들에게 매섭게 대하시는 분들이 자주 계셨다.(전부다 그런 건 아니고 내 경험일 뿐이니 오해 마시길) 아이의 담임 선생님을 나는 여태껏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내가 만난 3학년의 매정하시던 몇몇 선생님들과 오버랩되었다.
얼마 전 아이의 증모할머니께서 돌아가셔서 담임선생님들께 하이톡을 보냈다.
3학년 담임선생님은 "알겠습니다."한마디, 둘째 담임선생님은 "등교할 때 경조사 확인서 제출해 주세요. 조심히 다녀오세요."였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놀랐다. 나는 아이들 집안에 누군가 돌아가셔서 못 나올 때는 그래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정도는 한 마디 덧붙였는데, 그런 말조차 없다는 게 나만 이상한 건지 의문도 들었다.
내가 유난히 예의가 발라서가 아니다. 나는 학부모님들께 조금이라도 책잡히고 싶지 않아서 친절하게 대하고 약간의 오버도 섞는 편이다. 너무나 딱딱한 그 '알겠습니다.'는 같은 교사라서 더 의아했다.
1학기 상담 때도 큰아이 선생님을 뵙지 못했다. 상담 방법과 시간을 3 지망까지 선택하는데, 1,2 지망에는 대면상담으로 적고, 혹시 몰라서 3 지망에 전화상담을 적어서 제출했다.
회신에서는 3 지망으로 전화상담을 하겠다는 말이 돌아왔고, 그건 내 선택사항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선택한 거니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보통은 최대한 1 지망으로 적어주신 시간과 형식에 맞춰 진행했기에 선생님께서 대면 상담이 꽤 하기 싫으신가 보다, 하고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합리화했다.
아이는 선생님이 매일 화를 낸다고 했다.
이해한다. 1학기가 끝나가고 있지 않은가. 힘들 때고 힘들다.
수학시간에 설명도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고 한다. 학원을 다니지 않는 아이는 학교에서 배우는 게 전부인데 선생님은 그냥 한 번 설명하고 "알아들은 사람 손들어요." 하신단다. 이때 손을 들지 않으면 화를 낸다고 해서 억지로 손을 든다고 했다. "왜 못 알아들어?" 하면서 말이다.
아이의 말이 백 프로는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없는 말도 아니겠기에 조금 숨이 막혔다.
집에서 수학 익힘을 풀고 구몬연산을 푸는 게 끝인 아이에게 수학 문제집도 같이 풀라고 해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벌써 중학년이 되었으니, 하면서 나는 아이에게 자꾸만 더더 조금만 더를 외친다.
학교에서 무서운 선생님과 집에 오면 무서운 엄마 사이에서 아이는 힘이 들겠지.
오늘은 오랜만에 아이의 필통에 쪽지를 적어 넣어주었다. 아이가 자주 해달라고 하는 거지만 자주 못해주는 거였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데 필통 쪽지를 넣어주면 둘째는 어디로 갔는지 마구 찢어져 있거나 사라져 있고, 첫째는 그동안 준 것들을 고이고이 모아 보관하고 있다.
휴지조각처럼 쓰레기가 될 수도 있는 작은 마음들을 모아 간직하는 아이가, 다정하고 편안히 돌아올 집이라는 곳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선생님은 무서울 수 있다.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친절하고 다정하리라는 기대가 무너지는 지금이 오히려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이 조금도 원망스럽지는 않다.
무서운 선생님은 있어도 나쁜 선생님은 (웬만해서는) 없을 테니까. 또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도 언제나 늘 존재하는 것이기에, 불편하지만 극복해 보는 경험이 꽤나 소중할 것이다.
덕분에 숙제도 열심히 해가고, 지각도 안 하려고 일찍 출발하는 습관이 생겼다. 다 무서운 선생님 덕분이다.
생각해 보니 작년 선생님의 너무나도 "다 괜찮다"는 태도 덕분에 아이는 자주 지각을 했고, 빨리 가라는 나의 성화에도 "괜찮아. 안 혼나."라는 아이의 대답이 돌아왔었다.
무서운 선생님이 꼭 나쁜 선생님은 아니다. 그렇다고 다 받아주는 선생님 또한 나쁜 선생님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직업에 대해 반성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가. 나는 어떤 교사가 될 것인가. 매정해 보이는 게 다는 아닐 것이다. 하이톡에 "알겠습니다." 한 마디만 써도 그걸로 그 사람이 판단되는 것은 아니다. 속단하는 것은 가장 나쁜 습관이며, 누구에게나 단점과 장점은 공존한다.
나는 절대로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늘 배워나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교사가 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나는 내가 될 것 같다.
어떤 엄마가 될 것인지 아무리 궁리해도 나는 그냥 나다운 엄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