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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ㄷ Oct 24. 2021

7. 졸업을 축하합니다. 빚부터 갚으시죠.

브라이언 (Brian) 이야기

세 시간 동안의 우편분류작업이 마치면 20분간 휴식을 가진다. 몸 쓰는 일이라 쉬는 시간에 뭐라도 좀 먹어둬야 남은 시간 동안 나머지 일도 해낼 수 있다. 앉을자리라고는 건물 구석에 있는 직원 휴게실이 유일했다. 휴게실 왼쪽으로는 바깥으로 통하는 문과 창문이 나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오래된 냉장고와 물건이 제대로 채워 넣어지지 않아 별 쓸모없어 보이는 과자 자판기, 그리고 낡은 커피포트가 놓여 있었다. 그나마 성능이 괜찮아 보이는 전자레인지가 하나 있었지만, 안을 열어보니 온갖 음식물이 여기저기 튀어 엉망이었다. 휴게실 구석에는 군데군데 찢어지고 스프링이 다 망가진 듯한 천 소파가 하나 있었는데, 음식물과 커피 자국이 찌든 때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아무리 피곤해도 엉덩이 한 짝 걸치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작은 플라스틱 식탁과 의자들이 몇 세트씩 놓여 있어서 잠시 앉아 쉬고 밥 먹을 수 있었다.


그 시간에 휴게실에 오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람들마다 쉬는 시간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모두가 도시락을 싸오는 건 아니라서 근처 맥도널드로 가서 끼니를 때우거나 그냥 밖에 나가 담배 한 대 피우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미리 도시락을 준비해왔지만, 브라이언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오리엔테이션 때에도 그는 삼일 내내 점심시간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먹는 일에 관심이 없는 건지, 다이어트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나 혼자 먹기는 뻘쭘해서 가져온 도시락을 같이 먹자고 권했다. 브라이언은 괜찮다며 자판기로 걸어가 과자 하나를 뽑아왔다. 순식간에 먹어치우더니 과자를 하나 더 뽑아왔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나도 저녁을 먹고 왔는데도 세 시간을 일하고 났더니 배가 너무 고팠다. 다음날부터 브라이언도 도시락을 챙겨 왔다. 그래 봤자 초콜릿바와 음료수 하나가 전부였다. 소 한 마리도 거뜬히 때려잡아먹을 나이에 그렇게 먹고 배가 찰 리가 없다. 보고 있자니 안쓰러워 다음날부터 나도 도시락을 더 많이 준비해 갔다. 샌드위치를 하나 더 싸기도 했고, 과자며 과일이며 넉넉하게 가져가 나눠먹었다. 브라이언은 사양치 않고 받아먹었다.  


브라이언도 나도 둘 다 말수가 적은 내성적 인간이긴 했지만,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서 가만히 입 닫고 앉아 밥만 먹을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6주 동안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가족사까지 두루 나누며 친해졌다. 무엇보다 우리는 어리버리 임시직 동기였으니까.


브라이언은 우체국에 들어오기 6개월 전 대학을 졸업했다. 음대 작곡과를 졸업했으나 취업의 길은 요원하고 곡을 쓰고 음악을 만드는 일도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집중하기 힘들었다. 브라이언은 딱 봐도 힘쓰는 궂은일이라곤 전혀 못 할 것처럼 생겼다. 한 년간 햇이라곤 구경도 못해본 듯한 창백한 피부에 웬만한 근육맨들의 허벅지 사이즈에도 못 미칠 것 같은 가녀린 허리를 가진 이 친구는 태풍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도 나처럼 그저 편지를 분류하는 일 정도로 생각하고 우체국에 지원한 것이다. 그럼 그렇지. 저렇게 부실하기 짝이 없는 몸으로 이런 고된 노동을 선뜻 선택했을 리가 없다.


우체국에서 일 한지 이틀째 되는 날, 우편물 분류작업을 마치고 매거진 박스를 옮겨 담는 일을 하려고 보니, 토요일인 데다 추수감사절 연휴가 이어지는 주말이어서 그런지 박스가 몇 개 되지 않았다. 둘이서 넉넉잡아 이십 분 정도면 충분히 마칠 것 같았다. 리프트를 가져와서 작업을 시작하려던 찰나, 린다가 오더니 오늘은 일찍 퇴근하라고 했다. 어차피 다음 타임에 오는 사람들도 일이 많지가 않아서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면서. 나는 세 시간 일찍 들어가게 되어 기뻤지만, 브라이언은 난감한 표정에 실망이 묻어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세 시간만큼의 시급이 덜 들어오게 된 것이 전혀 반갑지 않았던 것이다.


곱상하고 여리여리한 이 친구는 여러 개의 파트타임을 뛰어야만 겨우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 저녁에는 우체국에서 일하지만 낮에는 카페에서 알바를 뛰고 간간히 지인이 만드는 음악에 세션으로 참여하거나 믹싱을 돕는 일로 불규칙적인 부수입을 얻는다. 대학을 나왔음에도 - 물론 작곡과 졸업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지만 -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무수한 이력서를 뿌렸지만, 답이 온 곳이라곤 카페와 우체국 밖에는 없었다고 했다. 대학 졸업장이 밥벌이를 보장해주는 시대는 일찌감치 끝났다고 하지만, 자신의 재능은 뒤로한 채 알바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현실은 장래가 시원찮은 작곡과를 나온 브라이언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불과 이삼십 년 전만 하더라도 어느 전공을 선택하든 일단 대학을 나오면 취업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웬만해서는 대학 졸업장만 가지고는 취업의 문턱을 넘기 힘들다. 잘 나가는 전공의 학부 졸업은 기본이고, 석사나 박사 학위, 그리고 인턴 경력까지 더 보태져야 한다. 그런데 석박사도 재정적 여유가 있어야 도전해 볼 수 있고, 인턴쉽도 연줄이 있어야 잡기 쉽다. 경제적 사회적 자본을 지니지 못한 저소득 또는 중하위 계층의 청년들이 오롯이 혼자 힘으로 취업의 문을 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친구 두 명과 허름한 아파트 하나를 렌트해서 사는 브라이언은 월세를 셋이 나누어내긴 하지만, 제대로 된 수입이 없는 그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졸업 후부터 갚아나가야 하는 학자금 대출금이 더 큰 문제였다. 졸업하고 카페 알바를 뛰며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그에게 매달 400불씩 되는 학자금을 갚아나가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대학 등록금 비싸기로는 미국이 세계 1위다. 등록금만 따져도 사립대학은 37,000불, 주립대학도 10,000불에서 27,000불까지 한다. 여기에 기숙사비와 기타 생활 비용까지 더하면 30,000불에서 50,000불을 훌쩍 넘어간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평균 9,000불이면 4년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대학 학비가 두 배 넘게 증가하는 동안, 중산층 이하의 소득은 80년대 이후로 계속 정체되어왔다. 내 자식이 공부 잘해서 하버드에 덜컥 붙었다 하더라도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이유가 바로 어마 무시한 학자금 부담 때문이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거의 무상에 가까운 대학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반면, 미국은 고등 교육에 필요한 비용을 모두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전가한다. 이렇게 유럽 대학과 미국 대학의 학비가 천지 차이가 나는 것은 교육정책에 대한 철학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럽은 ‘대학교육의 공공성’을 원칙으로 교육비용을 국가가 당연히 부담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반면, 미국은 철저히 ‘수익자 부담원칙’을 앞세우기에 민간부담이 높을 수밖에 없다. 수익자 부담원칙을 따른다 해도 어마어마한 등록금에 상응하는 교육서비스를 제대로 받고 있는지는 따로 따져볼 문제다.


부유한 가정의 젊은이들이야 부모가 학비를 해결해주니 맘껏 공부만 하면 될 테지만, 중산층 이하 가정에서는 부모의 지원만으로는 모자라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해야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다. 물론 각종 장학금 혜택도 많지만, 비싼 학비를 커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렇게 4년을 공부하고 나면 한 사람당 평균 30,000달러의 채무액을 안고 졸업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혹여 살아가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개인파산신청을 하더라도 학자금 채무를 면제받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심지어 학자금 대출계약서에 부모가 공동서명을 했다면 사고나 질병으로 자녀가 사망한 이후에도 대출금 상환 면제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죽은 자식의 학비도 계속해서 갚아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 돈이 무섭다고 공부를 접을 수는 없다. 아무리 대학 졸업장이 취업을 보장해주지 않는 시대라 하더라도, 대졸 학위마저 없다면 그만큼 사회 경제적 기회는 줄어들게 되니까.


브라이언은 그나마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조금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비록 6주밖에 되지 않는 임시직이지만 당분간은 숨통이 좀 트일 거라며 안도했다. 브라이언과 나는 일 시작하고 2주가 지난 금요일, 첫 급료를 받았다. 정해진 시급에서 야근수당 약 7.5 퍼센트가 더해진 금액이었다. 그는 낮에 카페에서 일하고 받은 월급과 합치면 집세와 학자금 대출금을 내고도 몇 백 불이 남을 거라며 좋아했다. 몇 주동안 더 모아서 갖고 싶었던 전자기타를 살거라 했다. 쉬는 시간에 폰으로 뮤지션스 닷컴에 들어가 장바구니에 담아둔 전자기타들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무슨 색깔이 예쁘냐 물어보았다. 물어본들 내가 뭘 아나.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할 악기의 사양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브라이언, 네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늘 처진 어깨에 흐물흐물 걸어 다니던 친구였는데, 고작 몇 백 불의 여유가 사람에게 생기를 더해준다. 쉬는 시간이 지나 매거진을 옮겨 담는데, 브라이언이 거기서 ‘롤링스톤’ 잡지를 하나 꺼내 들었다.


“내 얼굴 잘 봐 둬. 10년 뒤에는 이 표지에 내 사진이 들어갈 거니까.”


그러고는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우편 컨테이너 안으로 농구공 넣듯 잡지를 던져 넣었다. 그래, 부디 네 꿈 이루길 바란다. 네 꿈이 좌절되지 않고 이루어진 세상이라면 지금보다 조금 더 희망 있는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뜻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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