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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ㄷ Oct 24. 2021

8.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엠마 (Emma) 이야기

첫 일주일은 잔뜩 긴장하고 일을 했다. 근육은 늘 경직되어 있었고 온 힘을 다 끌어다 6시간 동안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어 버렸다. 우체국에서 일하면서부터는 룸메이트에게 가사업무의 70퍼센트 이상을 이양하고 최소한의 집안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책 한 장 읽을 여유가 없었다. 아침에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나면 다시 침대에 쓰러져 죽은 듯이 뻗어있다가, 오후에 겨우 일어나 이른 저녁을 대강 챙겨 먹고 일을 나간다. 일주일이 지나자 입술이 다 터지고 몸무게는 7킬로그램이 빠졌다. 다이어트를 그렇게 해대도 안 빠지던 살이 일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7킬로나 빠진 것이다. 처음이니까, 원래 뭐든 첫 일주일이 힘든 법이니까. 그런데 2주, 3주가 넘어가고 일이 손에 익어감에도 불구하고 일은 여전히 고되고 힘들었다. 더구나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면서 작업량은 두 배, 세 배 더 늘어나는 것 같았다. 


첫 일주일 동안은 11시가 되면 하던 일을 정리하고 바로 퇴근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11시에 칼퇴근을 할 때면 남아있는 직원들의 표정이 곱지 않았다. 분명 “굿바이”라고 인사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굿바이’나 ‘굿나잇’이 아니라 “벌써 퇴근하냐? 일찍 가네?”였다. 2주 차에 들어선 첫날에서야, 11시 칼퇴근은 어림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날도 11시가 되어, 브라이언과 나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옆에서 일하고 있던 엠마가 다가오더니 벌써 가느냐 물었다.   


"응, 11시잖아." 

"그런데,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잖아."

"알아. 그런데 다음 타임에 오는 사람들이 나머지 하는 거 아냐?" 

"맞아. 그런데 그 사람들도 이 많은 박스들을 내일 6시까지 정리하긴 쉽지 않지."  

"아, 그렇구나. 그런데 난 애들이 있어서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도시락 싸서 학교를 보내야 돼. 지금 가도 겨우 몇 시간밖에 못 자. 그리고 어쨌든 내가 일하기로 약속한 시간은 11시 까지니까."  

"나도 애들 있어! 막내는 이제 겨우 4개월이야. 난 젖먹이를 놔두고 밤에 나와서 일하는 거라고."   


그 말을 하는 엠마의 얼굴에 냉소와 노여움이 잠시 스쳤다. 엠마는 내가 우체국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상냥하고 예의 바른 친구였다. 그는 브라이언과 나의 사수로서 린다가 대강 설명해주고 넘어간 업무를 다시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늘 웃는 얼굴에 친화력이 좋아서 우체국의 모든 사람들은 엠마를 사랑했다. 작고 가녀린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무거운 박스도 척척 나르고 일의 속도도 남들보다 빨라서 매니저가 믿고 일을 맡기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도 많았지만, 린다는 엠마에게 우리 둘의 사수 역할을 맡겼다. 어리버리한 우리가 바보 같은 실수를 하더라도 짜증이나 화 한번 내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가르쳐주고 알아서 커버해줬다. 그런 친절한 엠마의 얼굴에 냉기가 스미는 걸 보니 당황스러웠다. 내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엠마도 자신의 표정을 깨달았는지 이내 다시 예의 그 친절한 표정으로 고쳐 돌아왔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보통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많이 바쁘거든. 여기서 일하면 오버 타임은 예삿일이라 생각하면 맘이 좀 편할 거야. 너네가 좀 더 도와주고 가면 고맙지. 그리고 오버타임 하면 시급을 더 높여서 줘.”


시급을 더 많이 준다는 말에 브라이언은 바로 가방을 내려놓고 목장갑을 다시 손에 꼈다. 나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제야 둘러보니 우리 말고는 다들 퇴근을 미루고 오버타임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엠마는 이제 겨우 스물셋이지만, 고등학교 스윗하트와 졸업하기 전에 벌써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지금은 벌써 두 아이의 엄마다. 계획에도 없었는데 졸지에 부양할 가족이 생겨버린 두 사람은 대학을 포기하고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대학을 포기했다기보다 애당초 대학 갈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엠마의 부모는 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이혼했다. 엠마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나중에는 마약에까지 손을 대면서 사람이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그 꼴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했다. 그러나 어머니도 자녀들을 제대로 보살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남자 친구를 갈아치웠고,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은 짧았지만 깔끔하지 못해서 매번 싸움박질 끝에 집안을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헤어지기 일쑤였다. 그런 집구석에 신물이 난 엠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자 친구를 따라 집을 나와버린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엠마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엠마가 없을 때 남 말하기 좋아하는 켈리가 해준 이야기다. 그러니 믿거나 말거나. 


엠마는 지긋지긋한 엄마 집을 떠나면서 저런 무책임한 부모는 되지 않으리라 결심했을 것이다. 남자 친구와 같이 살기로 하면서 그렸던 이상적인 가정은 따뜻한 온기로 둘러싸인 집에서 남편과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곰돌이 인형을 안고 포근한 침대에 누워 잘 준비를 하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책을 읽다 잠든 아이의 볼에 키스를 하는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질리도록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별 것 아닌 장면을 현실에서 자신이 연출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좁은 아파트에서 한 달이 넘도록 청소기 한번 돌릴 힘이 없어 먼지와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붙은 카펫 위를 기어 다니는 젖먹이와 하루 종일 껌딱지처럼 붙어서 칭얼거리는 두 살 아들을 방치하듯 돌보아야 하는 것이 자신이 처한 누추한 현실이었다. 남자 친구는 낮에 일하고, 엠마는 밤에 일한다. 마주 앉아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라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그것도 두 사람이 쉬는 날이 맞아떨어질 때 정도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은 늘 꿈꿔왔던 로망이었지만, 아이들이 잠든 시간 엠마는 우체국에 나와 일해야 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면 아이들은 훌쩍 자라 버릴 테고, 자신의 로망을 이룰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릴 것이다. 엠마는 자신의 엄마와 다른 삶을 살기 원해 집을 벗어났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엄마 인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브라이언은 대학이라도 나왔지만, 비슷한 나이의 엠마는 대학교육을 받을 기회마저 없었다. 브라이언은 우체국 일이 끝나면 또다시 여기저기 이력서를 뿌려가며 더 나은 삶의 기회를 노려볼 수 있겠지만, 이력서 한 줄도 채울 수 없는 학력과 경력으로 엠마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기회란 매우 제한적일 것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려면 대학을 나왔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에는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르는 원망도 섞여 있었다. 부모들은 자기들의 인생도 어쩌지 못해 늘 사고를 쳤고, 자식들은 들판의 잡초처럼 알아서 자라나야 했다. 커가는 동안 신발이며 옷이 작아져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서 언제나 자신이 먼저 요구해야 했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항상 그늘진 얼굴로 응대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어마어마한 등록금을 내면서 대학을 진학할 생각은 감히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가난한 이들에게 아예 대학 진학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들보다 더 많은 장학금 혜택을 누리며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공부만 잘했다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공부만 잘했더라면... 그러나 공부를 해야 한다고, 대학을 가야 한다고 조언해주고 다독여주는 어른이 엠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얼른 어른이 되어 치정과 폭력이 난무하는 집에서 탈출하는 것만이 청소년기의 유일한 목표였을 뿐, 대학이니 교육이니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엠마의 얼굴에 잠시 스친 분노는 누굴 향한 것이었을까. 물론 바빠 죽겠는데 눈치 없이 칼퇴하는 나에 대한 분노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을까? 어린애를 집에 두고 와서 밤새 일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였을까, 무능한 부모를 향한 분노였을까, 아니면 자신을 고아처럼 버려둔 차가운 세상을 향한 분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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