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쏘 쿨한 이 구역의 미친 x
켈리 (Kelly) 이야기
켈리는 내가 미국에서 만나본 사람 중 제일 이상한 사람이었다. 일단 켈리가 하는 말은 절반 이상 알아듣기 힘들었다. 물론 내 영어가 비루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 켈리의 말은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생소한 언어 같았다. 늘 대학교 언저리에서 생활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듣고 배운 영어는 주어와 술어가 일치하고 발음은 분명하고 표현은 단정하고 깨끗했다. 내가 대단히 고급스러운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 주위에는 위선이든 뭐든 품위를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엇보다 욕설은 영화에서나 듣지 일상에서 들을 일은 없었다. 그런데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십 년치 욕을 다 들었다. 그중 켈리의 공이 8할은 넘는다. 켈리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욕이 들어가는 문장을 구사했다. F- , B-, A- 등 욕이 들어가지 않으면 문장이 성립하지 않기라도 하듯 다채로운 욕을 섞어 썼다. 그런데 켈리의 욕은 욕 같지가 않아서 욕을 들어도 욕을 먹는다는 모욕감은 없었다. 마치 욕쟁이 할머니의 욕은 욕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켈리는 뭐라 규정하기 힘든 인물이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좋은 사람도 아니다. 쥐처럼 까맣고 조그만 눈으로 늘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며 어디 참견할 데가 없나 물색하기 바쁘다. 남 말하기 좋아하고 언제나 제멋대로이며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온갖 쌍욕을 해대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말없이 다가가 도움을 주고 도움의 대가를 셀프로 챙기기라도 하듯 욕 한 마디 툭 내뱉고 간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겠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모두가 미치도록 바쁘게 되자 누가 조금 힘들어 보여도 서로 못 본채 하고 말았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남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오지랖을 부려 남을 돕는 사람은 켈리가 유일했다. 특히 브라이언과 내가 힘들어 보이거나 너무 늦게까지 오버타임으로 일한다 싶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와서 도와주었다. 그렇게 도와주러 와서 남 말도 하고 신소리도 하다 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욕을 퍼부어도 우리에겐 욕을 삼갔다. 애송이들에게는 욕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라도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다만 늘 스마트하게 일하라고 조언했다. 상대가 브라이언과 내가 아니라 다른 직원이었다면 “스마트하게 일해” 다음에 ‘이 돌대가리들아’를 분명 붙였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사흘 전이었다. 우편분류작업을 마치고 브라이언과 함께 휴게실에 쉬러 갔더니 켈리와 마이크가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오자 사람 좋은 마이크는 농담 몇 마디를 던지고 나갔다. 마이크가 나가자 켈리는 마이크와 함께 아들놈 이야기를 한 거라며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아, 두 사람이 부부인가? 안 그래도 둘의 라스트 네임이 같아서 혹시 부부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같이 아들 이야기를 했다니 부부가 맞나 보다 싶었다. 집에서 해도 될 말을 왜 굳이 여기서 하나 싶었지만.
"안 그래도 라스트 네임이 같아서 둘이 부부인가 보다 생각했어."
"어, 부부였지. 마이크는 내 전 남편이야."
잠시 당황했지만... 뭐 여기는 아메리카니까. 당황한 나의 뇌가 적절하게 이어갈 다음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 사이에 브라이언이 전 남편이랑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거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다. 브라이언은 이제 켈리를 편안하게 생각하나 보다.
“불편하면 어쩔 건데. 씨발, 먹고사는 게 먼저지 그깟 이혼했다고 직장을 때려치우냐? 그리고 이혼한 지 벌써 십 년도 넘었어. 마이크랑 이혼하고 내가 능력이 좋아서 두 번이나 더 결혼했다고. 마이크는 남자로도 안 보여 이제.”
그런데 왜 라스트 네임을 바꾸지 않았을까. 켈리의 대답은 간단했다.
“귀찮아서. 성 바꾸는 거 존나 귀찮아. 그리고 걔 라스트 네임이 이쁘잖아. 듀란드(Durand). 이름 마음에 들었는데 뭐하러 바꾸냐.”
이름이 이름일 뿐, 맘에 들면 갖다 쓰는 거지 뭐 별다른 의미가 있냐는 거다.
거칠 것 없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켈리가 우체국에서 열심히 일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다음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육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였지만, 노후를 걱정하는듯해 보이진 않았다. 우체국에서 정규직에게 제공하는 은퇴자금이나 의료보험 같은 복지혜택이면 노후는 충분히 해결된 거라 생각했다. 린다나 패트리샤처럼 30년을 넘어 일한 사람들 중에는 성실하게 저축하고 돈을 모아 큰 집에 살면서 풍족한 노년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켈리도 근속한 년수는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알뜰하게 모으면서 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여전히 작은 아파트에서 벌이가 시원찮은 이혼한 딸과 손주까지 거두며 살아가지만, 휴가에서 쓸 돈은 아끼지 않는다. 해마다 휴가를 받아서 귀족처럼 여행을 하는 게 유일한 낙이며 죽도록 일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작년에는 크루즈를 타고 칸쿤으로 여행했고, 올여름에는 하와이를 2주간 다녀왔고, 내년에는 유럽으로 여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5년 전에는 친구와 로드트립으로 대륙을 횡단했다고 한다.
“더 늙으면 가고 싶어도 못가. 난 관절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돌아다닐 거야. 죽는 건 문제가 아닌데 늙고 병들어서 여행을 못 가게 될까 봐 그게 걱정이지.”
폰으로 여름에 하와이 여행하면서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쉬는 시간이 끝난 지 10분이 지나도록 휴게실에서 나오지 않자, 매니저인 린다가 눈치를 주고 지나갔다. 켈리는 린다가 가자마자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했다.
“평생을 이 미시간 촌구석에 살면서 바깥 구경 한 번도 못해본 바보 같은 것들하곤 말이 안 통해. 그렇게 모으기만 해서 뭘 해. 어차피 죽으면 가져가지도 못할 돈. 살아있는 동안 다 쓰고 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