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ㅈㄷ Oct 24. 2021

11. 해고인 듯, 해고 아닌, 해고 같은

처음 우체국 일을 시작하면서 염려했던 것은 허리였다. 허리 디스크로 오랫동안 고생을 해왔기 때문에 무거운 박스를 들고 나르다가 또다시 재발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첫 며칠 동안은 허리에 복대를 두르고 스포츠 테이핑을 하고 사고다발 부위에는 미리 파스까지 붙여서 오바육바 중무장을 해서 갔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니 허리보다는 손목과 발목이 문제였다. 무거운 박스가 있다 해도 내가 직접 들고 나를 일은 없었다. 다만 각종 소포 상자가 한가득 들어있는 APC라고 불리는 카트를 트럭에서 분류대까지 옮겨와 물건들을 하나씩 빼내서 와이어 컨테이너에 던져 넣기까지 주로 활용되는 신체부위는 손목과 발목이었다. APC 같은 큰 카트들은 비어있는 무게만 230파운드가 넘고, 가득 채웠을 때는 1200 파운드까지 나간다. 와이어 컨테이너도 자체 무게만 300파운드에 최대 2000파운드까지 물건을 채울 수 있다. 물론 바퀴들이 달려있지만 물건이 가득 들어있는 쇳덩이를 끌고 가려면 두 손으로 카트를 붙잡고 발뒤꿈치로 땅을 밀어내듯 걸어야 겨우 옮길 수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무거운 컨테이너들을 밀고 다녔더니 손목은 늘 시큰거렸고 발목도 불안 불안했다. 허리에 붙이던 파스와 테이프를 손목과 발목에다 붙였지만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진 않았다. 몇 주가 지나면서 일이 손에 익어 속도는 빨라졌는데도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면서 일이 더 고되게 느껴졌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 날,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첫발을 내디디는데 순간 악! 소리가 저절로 났다. 며칠 전부터 발목이 좀 부었나 싶었는데 이렇게 통증을 심하게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오른쪽 발목 어딘가에 염증이 생긴 것 같았다. 걸을 때마다 아파서 이래 가지고 일을 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희한하게도 오후가 되자 통증이 줄어들어서 걸을만했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6주간의 임시직 일도 끝나기 때문에 조금만 더 견디자는 생각에 일을 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이틀을 더 일했더니 발목 통증이 참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절뚝거리면서 일하는 나를 켈리가 보더니 미련 떨지 말고 린다에게 알리고 병원을 가라고 했다. 


린다는 업무 관련해서 부상을 당한 거니 산재를 신청하라고 했다. 그리고 우체국에 연계되어있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 산재 적용을 받기 위해 작성해야 할 서류는 어찌나 많은지 열몇 페이지 되는 신청서를 꼼꼼히 써냈더니 카트를 미는 것만큼이나 손목이 아팠다. 서류를 제출하고 토요일인 다음 날 오전, 우체국에서 알려준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가서 산재 서류를 내밀고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는데, 그 시간 나 말고도 한 명이 더 산재로 병원을 찾았다. 서류를 들고 온걸 보니 산재 같았다. 그는 머리에 붕대를 대강 둘둘 감고 있었는데 붕대 사이로 피가 비쳤다. 흙먼지로 뒤덮인 작업복에 서류를 들고 있는 거친 손은 주름마다 때가 끼여있었다. 무슨 일을 하다 저렇게 다쳤을까? 대기실에서 기다리며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데, 연신 별일 아니라고 괜찮다고만 했다. 글쎄, 내가 보기엔 별로 안 괜찮아 보이는데.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엑스레이를 찍고 진료실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더니 젊은 의사가 반갑게 인사하며 들어왔다. 의사는 엑스레이를 보더니 발목 통증은 아킬레스건에 생긴 염증 때문이라고 했다. 염증이 심해서 여기서 조금만 더 무리하게 되면 파열로 이어질 수 있으니 지금부터 최소 일주일 동안은 일을 쉬어야 한다고 했다. 이보게, 의사 양반. 내가 지금 한가하게 일주일씩이나 쉴 형편이 아니네. 어차피 일주일 후면 일이 끝날 텐데, 여기서 이렇게 관둘 수는 없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일이 많지 않고, 내일은 일요일이라 쉴 수 있으니 이틀 정도만 쉬고 다시 일을 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의사는 한숨을 한번 쉬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글쎄, 그럼 최소한 사흘은 쉬었다가 괜찮아지면 다시 일하는 건 어떨까’ 하면서 협상을 시도했다. 월요일까지 사흘만 쉬어도 다 나을 것 같았다. 의사가 끊어준 진단서를 들고 린다를 찾아갔다. 린다는 월요일까지 푹 쉬고 화요일에 다시 보자고 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주말 다운 주말을 보냈다. 드러누워 영화도 보고 오랜만에 책도 읽고 잠도 늘어지게 자면서 마음 편하게 푹 쉬었더니 몸도 한결 가벼워지고 발목도 일주일은 더 일할 수 있을 만큼 나아진 것 같았다. 다음날 출근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출근 30분 전이었는데, 갑자기 린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린다는 크리스마스가 지나서 일이 많이 줄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일하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급여는 지난 금요일까지 일한 것으로 정산해줄 것이라며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계약된 날짜가 일주일이 더 남아있었는데 오늘, 아니 지난주 금요일부로 계약이 종료된 것이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왜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린다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어차피 일주일이면 끝날 일, 몸도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니 일찍 끝나서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모른다며 긍정적 사고 회로를 돌려보지만 영 기분이 더럽다. 뭔가 부당한 일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다. 지난주에 발목 부상을 당하고 일의 속도가 떨어지면서 더 이상 나의 쓸모가 없어졌다고 생각하여 자른 모양새다. 미국에선 하루아침에 잘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던데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당일 해고 통보인가 싶었다. 어차피 일하러 가던 길이었기에 바로 우체국으로 향했다. 도대체 왜 잘린 건지 물어는 뵈야겠다 싶었다. 


린다는 사무실에 앉아 전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무실 게시판에는 나와 다른 모든 임시직들의 마지막 근무일이 일주일 뒤라고 분명하게 적혀있었다. 전화를 마친 린다는 나를 보더니 얼굴을 굳혔다. 


“좀 전에 내가 보낸 문자 받았니?”


“받았다…”


그러고는 한참 말이 없었다. 할 말을 찾는 중인 듯했다. 설마 내가 여기까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바보같이 오케이하고 전화를 순순히 끊었으니까. 


“여기 게시판에도 이렇게 일주일 뒤에 계약이 끝난다고 되어 있잖아. 만약에 일이 줄어들어서 그만두라는 거면 다른 임시직들도 나처럼 오늘 다 그만두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스케줄에 대해서는 개인정보라서 너에게 알려줄 수 없어.” 당연히 알려주기 곤란했을 것이다. 다른 임시직들은 오늘도 나와서 일하고 있었으니까. “너에게 좀 더 일찍 알려줬더라면 좋았겠지만 좀 전에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라 어쩔 수 없었어.” 


매니저 미팅은 보통 오후 4시에 있다. 그럼 1시간 전에 해고를 결정하고 출근하기 30분 전에 알려줬다는 말이다. 아무리 임시직이라지만 사람 하나 자르는 일이 참으로 편리하고 간단하구나. 


“아무래도 내가 다쳤기 때문에 해고를 당한 것 같은데, 상당히 부당하다고 느껴지는걸?” 


“그렇지 않아. 넌 해고를 당한 게 아니라 그냥 할 일이 없어져서 일이 끝난 거야. 그리고 크리스마스 연휴가 지나면서 정규직들이 휴가에서 많이 복귀해서 일손이 더 필요하지도 않아. 아마 브라이언도 오늘이 마지막 출근일이 될 수도 있어.” 


아, 나 때문에 괜히 브라이언까지 잘리게 생겼구나. 여기서 더 이상 대화를 진행하다간 엄한 사람에게까지 불똥이 튀겠다 싶어서 그만뒀다. 나는 직원 아이디를 반납하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는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쫓겨나듯 플랜트를 나왔다. 공식적으로는 ‘해고’가 아니라 그냥 일이 줄어들어서 일찍 계약이 종료가 된 것이라니,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별도리가 없었다. 힘이 빠져 집에 돌아왔더니 브라이언에게서 문자가 왔다.   


- 린다가 뭐래?

- 크리스마스 지나서 일도 줄어들고 휴가 갔던 정규직들도 다시 돌아오고 해서 내가 할 일이 없대. 근데 아무래도 내가 다쳐서 잘린 거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네. 

- 무슨 소리야. 오늘 일하는 사람 수가 오히려 평소보다 적은걸? 마이크랑 엠마도 네가 다쳤기 때문에 자른 것 같다고 말했어.   

- 그래, 그런 것 같아. 근데 힘없는 내가 뭘 어쩌겠니. 아무튼 사람들한테 인사도 못하고 헤어져서 아쉬워. 대신 안부 전해줘.   


다음날 브라이언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 나도 내일부터 나오지 말래. 


아, 미안해서 어쩌지. 아무래도 나 때문에 구색을 맞추느라 브라이언까지 자른 것 같다. 그에게는 단 1불도 소중한데 일주일치 급여가 사라지게 되었다.  


- 브라이언, 넌 괜찮아?

-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제 좀 쉬려고.   


우리 ‘을’들은 이렇게 쿨하고 관대하게 해고를 받아들였다. 몸도 아팠는데 차라리 잘됐지 싶다가도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 생각할 때마다 억울한 마음이 불쑥불쑥 솟긴 했지만.  


미국에 살면서 해고당하는 사람들을 내 주위에서도 종종 봐왔다. 룸메이트가 박사과정을 했던 대학교 연구실에서 행정직으로 30년 넘게 일했던 도로시 아줌마도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했고, 어느 IT 기업에 근무하던 아이 친구의 아빠인 토마스도 회사에 대규모 감원 바람이 불던 시기에 쫓겨났다. 같은 회사를 다니던 우리 가족의 오랜 친구 종규 씨도 어느 날 갑자기 해고를 당했다. 그 후에 더 좋은 회사, 더 높은 직급으로 옮겨가긴 했지만, 그 당시 종규 씨와 가족들이 겪은 스트레스는 말도 못 한다. 직장을 잃고 보름을 꼬박 앓았다고 했다. 핏기 없이 누렇게 뜬 얼굴로 살이 쏙 빠져서 나타났을 때 갑작스러운 해고로 인한 심리적 타격이 얼마나 큰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한국은 근로기준법상 사용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노동자를 해고할 수 없게 되어있지만, 임의 고용이 원칙인 미국은 회사가 특별한 사유 없이도 직원을 해고할 수 있다. 불법적이거나 차별적인 사유로 해고했다면 노동자 측에서는 부당해고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용자들은 해고 동기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알려줄 의무도 없다. 물론 노동자 역시 특별한 사유 없이 언제든 회사를 그만둘 수 있다. 


미국은 노동시장 유연성이 가장 높은 나라다. 개인 해고는 물론이고 대규모 정리해고도 손쉽게 할 수 있다. 노동자의 안전이나 고용 형평성에 관해서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채용과 해고에 있어서는 사실상 아무런 규제가 없다. 노조도 허약해서 사용자의 횡포에 맞서 노동자를 대변해주는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다. 사실상 고용보호에 대한 안전장치가 거의 없는 셈이다. 


미국 경제성장의 동력은 바로 높은 노동시장 유연성에서 나온다고들 한다. 과감하게 해고하지만 그만큼 채용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역동적이고 유연한 노동시장이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똑똑한 학자들의 연구결과가 그러하다면 썩 내키지 않는 결론이라 하더라도 수긍하는 수밖에. 사실 노동시장이 유연하든 경직돼 있든 알 바 아니다. 그게 뭐가 됐든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만, 경제적 효율성을 산출하는 방정식 속에 해고당한 노동자 개개인이 겪어야 할 스트레스와 심리적 불안, 생계기반을 잃어버림으로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불행에 대한 값도 계산되어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언제든 이유 불문하고 해고를 당할 수 있는 노동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로시와 토마스와 종규 씨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 줄어들진 않았다. 미국처럼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져있지 않은 나라에서 해고는 또 다른 불행으로 이어진다. 국가 건강보험제도가 없는 미국에서는 직장을 통해 건강보험에 가입되어있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의료비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미국에서 건강보험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장을 잃으면 마음 편히 아플 수도 없다. 과연 그 ‘유연성’이라는 것이 해고당한 노동자들에게도 유연하게 다가오는 단어인지 물어보게 된다. 


경제성장 수치를 나타내는 빛나는 숫자들 뒤에 숨어있는 노동자들의 불안과 눈물과 고통도 같이 헤아려볼 수는 없는 것인지, 아니면 경제를 논하는 엄숙한 자리에서 쓸데없는 감상 따위는 넣어둬야 하는 것인지, 해고인 듯, 해고 아닌, 해고 같은 '새드 엔딩'을 겪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이전 10화 10. 가난한 동네, 가난한 학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