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싸움의 시작은 보어가 열었습니다. 전자의 원자 안에서의 원운동의 궤도가 띠엄띠엄 하다는 것이 시작이었죠. 이러면 그 띠엄띠엄한 원 궤도를 이동할 때 뿅~ 하고 순간이동을 해야 하니까요. 이것을 뉴턴의 후예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리가 없었죠. 그 순간이동의 순간은 도대체 속도는 어떻게 되고, 또 언제 뿅~ 한다는 건지...
바로, '순간이동의 순간은 도대체 속도가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가 엄청 중요한 지점입니다. 위치가 이동된 그 순간에 뿅하고 와버렸으니, 속도가 무한대? 시간분의 거리가 속도인데, 시간이 0 이잖아요. 위치가 변해서 그걸 확인한 순간에는 속도가 정의가 안된다는 것이잖아요. 이래서는 뉴턴의 역학이 말이 안되게 됩니다. 속도도 모르는데 F=ma가 뭔 소용이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보다 확실하게 말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하이젠베르크 였습니다. 그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위치와 운동량(속도)는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즉, 위치를 정확히 보면 운동량(속도)은 아애 모르게 되고, 반대로 운동량(속도)를 정확히 보면 위치를 모르게 된다는 것이죠. 이건 갈릴레오 형님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이야기인 것이죠. 속도와 위치를 안다는 전제에서 시간을 곱하면 다음 위치가 예측되잖아요. 10m/s 속도로 움직이면 10초뒤엔 100m에 있다, 이렇게 말이죠. 그런데, 10m/s인 속도를 확인하면 어디있는줄 모른다고? 또는 10초 뒤에 100m에 있는 걸 확인하면 속도가 완전히 뒤바뀐다고?
이것은 근대 물리학의 근간을 뿌리 채 뒤흔드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보어의 띠엄띠엄 궤도에서 이미 엿보였던 것이죠, 앞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그 이동의 순간에는 운동이 근대 물리적으로 정의되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근대 물리에서는 내가 물체를 본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보든 말든 지구는 돌고, 달도 돌잖아요. 하지만, '너가 보면(측정하면) 움직이던게 다 바뀐다~'고 하기까지 하는 것이죠. 특히 보는 순서가 바뀌면 결과도 바뀐다는 것이 충격이었죠. 위치를 보는 것과 속도를 먼저 보는 것이 결과가 다르다니. 단지 내가 보는 행동이 결과를 바꾸다니.
근대 물리는 모든 물질의 운동은 완전하게 기계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힘만 알면 가속도를 알아서 속도의 변화를 알고, 속도를 알면 위치를 알게 되니까요. 모든 것은 운명처럼 결정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 단지 내가 보는 것 만으로 그 완전한 예측의 세계라는 운명이 바뀐다는 것이잖아요. 마치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서 세상이 이렇게 된 것 처럼. 그녀가 안 봤으면 이리 되지 않았을 것 처럼 말이죠.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이, 교재에서 불확정성의 원리를 처음 배울 때 물질이 파동이라면 자연스러운 것 처럼 설명해요. (이건 또 뉴턴의 후예들이 열받아 하는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에서 자세히 설명할께요) 아인슈타인이 엄청 칭찬한 드브로이의 물질파를 근거로 하죠. 물질이 파동이라면, 그 물질인 파동의 속도가 정해지면 사인파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그 때 위치를 측정하면? 사인파가 갑자기 아니게되죠? 한 위치에만 뭉칠텐데요. 이 상태는 수학적으로는 모든 속도를 가지는 사인파의 합으로 나타날 수 있어요. (수학으로는 푸리에 변환 관계) 즉 모든 속도가 가능하다는 것이 되죠. 물론 하이젠베르크가 처음 이 방식으로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그렇게 띠엄띠엄인 양자물리학을 싫어했던 아인슈타인인데... 사실 이 뉴턴의 후예들 덕에 정말 많이 발전합니다, 양자물리(띠엄띠엄)는.
또 다른 설명도 아인슈타인을 열받게 하죠. 전자가 어디 있는지 보려면 빛을 쪼여야 하잖아요. 빛으로 봐야 하니까.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빛은 입자라고 하고, 운동량(속도)과 에너지를 가진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마치 당구공으로 때리듯이 빛의 입자인 광자가 전자를 때리게 되잖아요? 보려고 때리니까 전자는 다른데로 도망가서, 어디 있는지(위치) 어디로 가는지(속도) 알 수 없게 된다는 주장도 합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일부러 뉴턴의 후예들 열받으라고 그런건 아니겠죠. 그 당시 주류의 흐름이 뉴턴의 후예이니, 그들의 논리로 어떻게든 설명했을 뿐.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제안할 때 제논의 역설도 떠올렸다고 합니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10m 앞의 거북이를 따라가면 1m 거북이가 앞으로 가고, 1m 따라가면 0.1m 거북이가 앞으로 가고, 0.1m 따라가면 ... 못따라잡는다는 건데요. 이건 진짜 못따라잡는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연속적인 운동을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움직이는 속도를 가진 운동을 하는 것은 딱 연속적인 한 순간을 알 수 없다는, 즉 그런 위치를 특정하여 다룰 수 없다는 거죠. 불확정성의 원리와 닮아있죠? 사실 제논의 역설이 논리적으로 완전히 극복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다만 뉴턴이나 갈릴리오는 르네상스의 정신에 충실히, 논리 보다는 인간에의 유용함을 따랐을 뿐. 그래서 과감히 미분을 발명하죠. 미분이 바로 시간도 위치도 0 으로 보내면서 나누는 거잖아요, 위에 거북이 따라잡는 순간처럼. 뉴턴은 과감히 무시한거죠, 제논을. 그런데 20세기에 와서 제논의 유령(?)이 부활이라도 하듯이 불확정성의 원리로 재탄생한 걸까요.
근대 물리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이 되는 운동의 상태는 위치와 속도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그 다음에 무엇을 할 수 있죠. 불확정성의 원리는 이것을 전적으로 부정해버렸습니다. (물론 실험적인 증명도 나중에 합니다. 특히 전자 스핀으로.) 이걸 보고 반대파가 가만히 있지는 않겠죠? 다음 시간에는 그 역습을 이야기 합니다!
[참고]
사실,하이젠베르크는 전자를 원자보다 단순한 조화진동자(용수철에 매달린 진동)로 풀다가 불확정성의 원리를생각했다고 합니다. 위치와 속도에 대한 것이 이상하게 순서를 바꾸면 달라졌다고 해요. 그래서 위치나 속도의 작용(아마 측정)의 순서에 따라 달라진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