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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진 May 17. 2022

지각

2022년 5월 17일

몇 년 전 남미 여행을 다녀왔을 때의 일이다. 이례적으로 열흘이 넘는 휴가를 받은 뒤였다. 기자들에게 긴 휴가를 승낙해 준 편집국장과 식사 자리였다. 그는 자랑스럽게 휴가 계획을 물었다. “자네는 이번 휴가 때 무얼 할 계획인가?” 매사에 꼼꼼한 내 동기는 북유럽으로 휴가를 갈 계획을 짜두었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관심은 내게 쏠렸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남부럽지 않은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저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남미 여행을 가는 걸 고민 중입니다”. 물론 계획에도 없었던 일이다.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아마존에 여행에 갔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렇게 나는 등 떠밀린 듯 남미를 반드시 가야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턱없이 게을렀다. 닥치는 대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일상이었다. 무언가를 철저히 계획하고 실행해본 경험은 없었다. 하물며 '만리타역'이나 다름없는, 지구 반대편의 남미라니. 그건 무모한 짓이었다. 그 이전의 해외여행에서도 나는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이 낭만적이라고 둘러데며 어설픈 여행을 떠나곤 했다. 나태함은 휴가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에 묻어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결국 페루로 떠나야 할 휴가일이 다가올 때까지 부랴부랴 비행기 편을 결제해둔 것을 빼고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나는 공항으로 떠나는 순간까지 후회하고 있었다. 미리 계획을 세워두지 않은 점도 자책했다. 새벽까지 한숨도 자지 못하고 벼락치기 준비를 했다. 남미에는 어떤 나라들이 있으며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이런 기본적인 상식도 없었다. 당장 내가 어디서 잠을 자야 하는 지도 정하지 못했다. 언젠가 베네수엘라에서 버스 강도를 당했다는 후배의 이야기가 자꾸만 떠올랐다. 이대로 출발한다는 것은 아직 젊은 남성이라고 해도 너무나 무모했다. 그리고 내가 허둥지둥 대는 사이 비행기는 이미 활주로에서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남미로 가는 휴가 첫날을 망쳐버렸다.


불행하게도 내 지독한 습관이 바뀌지 않았다. 짐을 끌고 도로 집에 돌아온 나는 ‘내일까지는 반드시 계획을 하고 떠나야지. 그러면 될 거야’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지만 다음날이 돼서도 나는 제대로 된 여행 계획을 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어떻게든 부딪혀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언젠가 가수 이적 씨와 유희열, 윤상 씨가 출연했던 예능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남미로 떠났지만 내내 즐거워했던 그들. 하지만 그건 방송에 비친 모습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보다 더 무턱대고 남미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분명 없을 테지. 나는 어제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이 집을 나섰고, 이번에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정해진 것은 그저 미국 달라스로 먼저 가서, 다시 멕시코 칸쿤으로, 그러고 나서 페루로 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출발이었지만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미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잔뜩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불과 하루 전에 비행기를 탔다면, 간단하게 한 차례만 경유했어도 됐을 텐데. 이렇게 동선이 복잡해진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늦었기 때문에. 그래서 전날 비행기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남미까지 아무리 직항 노선이 없다고 해도 더 힘든 길을 올라야 했다. 30시간 가까운 비행시간 동안 나는 여행의 밑그림을 짜는데 열중했다. 이미 출발에만 하루, 이틀을 썼기 때문에 남은 시간 최대한 효율적으로 동선을 움직여야 했다. 혹시라도 미국이나 멕시코에서 잘못 비행기를 갈아탄다면 큰일이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최악의 상황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걱정은 늘 적중하고 기대는 늘 빗나가는 법이다. 미국 달라스 공항에 내린 나는 간단한 입국 수속을 하고서 다음 비행기가 이륙하는 환승 게이트로 향했다. 처음 와 본 미국 댈러스 공항에는 어딜 가나 승객들이 많았는데, 이곳을 구경하느라 비행기를 또 놓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내가 찾아간 게이트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멕시코로 향하는 다음 비행기의 탑승 수속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순진하게 '지연 출발'이라 믿었던 나는, 이륙까지 15분을 남기고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알고 보니 내가 타야 할 비행기는 활주로 사정으로 댈러스 공항의 정 반대편 게이트로 옮긴 뒤였다. 아뿔사,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공항을 가로질러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미국 댈러스 공항은 텍사스 주에서 가장 큰 공항이기도 했지만, 전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공항이기도 했다. 창문 밖으로 활주로를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나는 망연자실했다. 그냥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는 발걸음을 쉽게 돌리지 못했다. 그건 예상치 못한 모든 상황들보다, 결과적으로 내가 포기하는 것만 남았다는 걸 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길을 물어 공항 한 구속에 있는 항공사의 안내데스크를 찾았다. 그리고 승객들 가운데서 줄을 서서 순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내 안경을 쓴 흑인 여성 직원이 나를 맞았다. 그때 나는 서투른 영어를 섞어가며 상황을 설명했다. 평소 영어에 대한 내 자신감과는 별개로 , 급한 마음에 내 뜻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의문이다. 어쩌면 수백만 원을 주고 항공권을 아예 새로 끊어야 할 수도 있겠지. 그건 내가 모두 감당해야 할 결과였다. 결과는 알 수 없었다. 아직도 내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혀있었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안경을 쓰고 내 이야기를 듣던 흑인 여성은 이내 말을 꺼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 날도 있는 거죠". 모든 게 괜찮다는 말을 듣는 그 순간 나는 행운이 찾아왔음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알아보겠다"는 그녀의 미국식 영어 표현마저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는 내가 한국에서 찾지 못한 항공권이 아직 남아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원래 계획대로 멕시코에 가는 것보다 더 빠르게 곧바로 페루로 가는 일정이었다. 그렇게 나는 항공권을 아무런 조건 없이 교환받았다. "칸쿤에 가시는 것보다 이게 더 빠를 겁니다. 괜찮아요. 이번에는 놓치지 말기를 바라요". 나는 그녀에게 수차례 감사 인사를 하고, 이름을 물어본 뒤 항공권에 적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을 소중히 보관해 남미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까지 지녔다. 그리고 그 항공권은, 내게 게으름을 깨우쳐 주는 강력한 징표로 여전히 갖고 있다.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종종 '돈으로 시간을 사고 있다'는 표현을 쓰곤 했다. 매일 빽빽하게 가득 찬 일정표를 보면서 일견 뿌듯함도 느꼈다. 하지만 몰려오는 업무와 숨 막히는 인간관계에 쉽게 피로감을 느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씀씀이에 대해 경계심이 없었다. 나는 가까운 거리라도 손쉽게 택시를 탔고, 짧은 해외 휴가를 갈 때면 자유를 외치며 갑부처럼 굴었다. 하지만 매일 주체할 수 없는 일상은 공적인 영역뿐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영역까지 영향을 미쳤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시간과 기회에 무척 둔 한 사람이 돼버렸다.


남미 여행에서 얻은 교훈은 달랐다.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거나, 아무리 늦더라도 괜찮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우리의 삶은 어느 것 하나 예상한 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이다. 때로는 하루를 망쳐버릴 만큼 불쾌한 악재들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내 사정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해준, 너그러운 흑인 여성 같은 존재가 항상 있을 거란 기대를 해선 안 될 것이다. 누군가는 당신에게 배신을 당하고 실망한 나머지 그다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내가 해야 할 것은 확실하다. 내게 그 기대가 남아있는 시간과 기회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 그러니까 절대, 절대 늦지 말라는 것이다. 그건 억만금을 주더라도 살 수 없다.


지금의 나는 그 교훈을 얼마나 잘 되새기고 있을까.  가끔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얼마 전 방송을 하면서 예상치도 못한 이유 때문에 또다시 지각을 하고 말았다. 생애 첫 '방송사고'는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어떤 사정을 듣더라도 내게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 어느새 여름 풍경이 돼버린 한강을 바라보면서 뜨거운 감정이 들었다. 햇빛이 내리쬐는 미국 댈러스 공항의 유리창에 기대어, 나를 두고 떠나가던 비행기를 바라보던 그때가 기억난다. "그런 날도 있는 거죠". 책상 서랍 속에 묻어둔 잉크빛 바랜 멕시코행 탑승권을 꺼내본게 언제였더라. 미처 알 지 못한 사이 내게 어긋나 버린 기대들이 떠오른다. 날카롭게 산산조각난 마음의 파편들을 꿰어 맞추는 일은 쉽지 않다. 나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놓쳤는가. 얼마나 더 반성하고 있는가. 얼마나, 얼마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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