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에서 처음 만난 친구들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왔지만 그들은 모두 남자였고, 이미 한 무리였기 때문에 내가 껴서 친하게 지내는 것이 어려웠다. 대신에 같은 룸을 쓰고 있는 언니와 먼저 친하게 되었고 덕분에 언니와 친하게 지내던 다른 언니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스무 살이었던 나, 그중에 내가 제일 어렸다. 언니들은 나보다 2,3살 몇몇은 6~10살 정도가 많았고, 아마도 20대의 모든 나이대가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특히 친하게 지냈던 언니들은 나보다 두세 살이 많던 언니들이었다. 그때 만난 몇 명의 언니들은 여전히 서로를 잊지 않고 연락하며 지내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나는 스무 살 생일을 세부에서 맞이했다. 지금은 오히려 생일이 굉장히 중요한 이벤트였는데 그때는 그곳에 지내느라 잊은 모양이다. 본래 내 생일은 겨울인데 여름나라에 지내게 된 것이 이유인듯하다. 생일 전날 인지 깜박한 채 언니들이랑 놀다가 내 방으로 돌아갔다. 이미 밤 12시가 가의 되어가는데 언니들이 잠깐 자기 방으로 내려오라고 한다. 그래서 내려가 방문을 열었더니 깜깜했다. 그때 생일 축하노래가 들리며 환하게 불이 밝혀진 케이크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날 받았던 블루베리가 빼곡하던 치즈케이크를 여전히 잊을 수가 없다. 생각지도 못한 서프라이즈 파티라 지금까지 기억나는 하루다. 먼 타지에서 맞는 생일, 챙겨준 언니들에게 정말 고마웠다.
그다음 날 저녁 언니들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갔다. 지금이었으면 크게 생일턱을 쐈을 텐데 아무리 세부라도 스무 살의 내가 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우린 저녁을 맛있게 먹고 1/n로 돈을 나눠내고 돌아왔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생일을 기념하여 다 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한껏 멋 부린 스무 살 초반의 우리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 사진은 싸이월드 내 홈페이지에 영원히 박제되어 있다. 얼마 전 사진첩이 열려서 다시 봤는데 그때의 우린 정말 정말 어리고 푸릇했다. 여전히 그리운 그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날이다.
나와 함께 방을 썼던 제시카 언니는 인기가 많았다. 한국에서도 많았을 것 같고, 역시 세부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우연히 언니가 알게 된 그 남자는 마닐라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마닐라 - 세부를 왔다 갔다 했는데 어느 날 우리를 세부 집으로 초대했다. 세부에서도 잘 사는 집들은 경비가 삼엄했다. 경비를 거쳐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부모님이 여행 가고 없으셨을까? 먼저 우린 집 구경을 했다. 집을 다 구경하진 못하고 대략 구경했는데, 한눈에 봐도 잘 사는 집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수영장이 있었다. 그렇다. 우린 수영을 하려고 그곳에 따라간 것이다. 그 수영장에서 한참을 신나게 놀다가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 남자아이는 수영하는 내내 제시카 언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참고로 그는 한참 어린 연하였다.
때때로 우린 DVD를 빌려봤다. 한국 식료품이 파는 가게였는데 그때 유행하던 드라마를 바로바로 DVD로 빌려 볼 수 있었다. 그때도 인터넷을 사용하던 시절이라 가능했으리라. 뭐 지금이야 넷플릭스가 있어서 어딜 가도 쉽게 볼 수 있지만 그때는 그게 없었던 시절이다. '아씨'라는 이름을 가진 슈퍼마켓에 사는 한국 식품 판매는 물론 DVD까지 빌려줬다. 보통 한 명이 빌려오면 다 같이 모여서 보는 식으로 함께 시청했다. 오랜만에 검색해보니 그 아씨 슈퍼마켓은 여전히 세부에 건재하고 있다. 그 모습 그대로.
세부 어느 지역 마켓에 가면 저렴한 가격에 유명 영화 DVD를 파는 곳이 있었다. 아마도 불법 DVD였던 것 같은데 유명 영화는 물론, 디즈니 애니메이션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그것을 사러 어학원 튜터에게 부탁해서 함께 갔는데, 길거리에 매대도 아니고 바닥에 잔뜩 DVD를 깔아놓고 팔고 있었다. 우린 그중에 원하는 DVD를 골라서 사가면 되었다. 나는 좋아했던 영화와 애니메이션류를 잔뜩 사서 돌아왔다. 가격은 개당 20페소였나... 40페소였나... 한국으로 가지고 돌아와 몇 번이나 봤을까 그런데 DVD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DVD 빌려보는 한국 가게 근처에는 한국 음식을 판매하는 술집이 있었다. 아주 가끔, 가뭄에 콩 나듯이 저녁에 다 같이 택시를 타고 가서 양념치킨을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도 치킨이 비싸서(물가에 비해) 절대 자주, 매번 먹지 못했다. 한국에서 먹던 양념치킨을 세부에서 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때론 스노쿨링, 호핑투어
우리는 매주말 그곳에서 액티비티를 즐겼다. 어떤 날엔 어학원에서 모집하는 주말여행에 참가하기도 했고 때론 우리끼리 인원을 모아서 차를 빌려 떠나기도 했다. 다 함께 가화산에 폭포를 보러 다녀왔다. 대나무로 만들어진 배을 타고 물이 떨어지는 곳 아래를 지나가 보기도 하고 잠시 물놀이를 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이빙도 하던데 나는 겁이나 할 수가 없었다.
어떤 주말엔 호핑투어를 하러 모알보알에 갔다. 스노클링 장비를 착용하고 물속에 뛰어들었는데 깊어서 무서웠다. 하지만 바닷속으로 가득 보이는 물고기들이 얼마나 예쁘고 신비로웠는지 모른다. 어떤 날에는 초콜릿 힐을 보러 보홀에 가기도 했다. 아직 계절이 일러서 초콜릿 힐은 볼 수 없었지만 대신 초록 힐을 만났다. 보홀에서 만난 타셔라는 안경원숭이는 정말 작고 귀여웠다. 세부의 오슬롭에 가면 고래상어를 볼 수 있다던데 그때는 몰라서 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아쉬웠다. 다시 세부에 간다면 아이와 고래상어를 보러 떠나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보홀, 우기에는 갈색으로 변해 초콜릿 힐로 변신
필리핀, 세부. 그곳은 나에게 마음의 고향이었다. 어쩌면 처음이라 더 각별한, 그리고 애틋한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오래도록 그곳이 생각나고 그리운 것을 보면 이상하기도 하다. 나는 그곳이 너무 좋았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정말 모두 좋았다. 세상은 신나고 즐겁고 사람들은 재밌고 친절하고, 그때 나의 세상은 그랬다.
얼마 전 싸이월드 사진첩이 복구되었다. 세부에서 찍었던 사진이 모두 남아있었다. 사진 한 장 한 장 보다 보니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나의 스무 살, 세부... 영원히 마음속에 잘 담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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