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경 Jan 06. 2024

마음의 품격을 높이는 비결

"운을 대하는 태도가 마음의 품격을 높인다"



삶이 고통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첫째, 더 나쁜 일이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었음을 생각하라. 둘째, 지금은 편안하게 떠올리는 일이 한때 당신을 괴롭게 했던 사건임을 기억하라. 셋째, 이 순간이 고통스럽다면 당신이 믿음을 단련해야 하는 순간임을 기억하라” 삶은 행복과 고통의 연속이다. 우연히 찾아든 행운 덕분에 웃기도 하고 원치 않는 불운 때문에 울기도 한다. 중요한 건 행운과 불운을 대하는 마음 태도가 삶을 더 큰 행복 혹은 더 큰 불행으로 이끈다는 사실이다. 더 행복해지고 싶다면 운을 대하는 마음 자세, 즉 마음의 품격을 높이면 된다.




마음의 품격은 우리에게 온 행운과 불운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95세를 살면서 약 1만 곡의 아름다운 찬송가를 작사한 사람이 있다. ‘찬송가의 여왕’이라고 알려진 패니 크로스비다. 그녀는 태어난 지 6주 만에 의사 실수로 한 평생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 조금 늦은 나이에 사랑하는 남편을 만났고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는 곧 세상을 떠났다. 패니 크로스비의 삶을 바라보면 애통하고 분할법도 하지만, 그녀는 매 순간을 감사와 행복으로 채웠다. 패니 크로스비가 만든 아름다운 찬양시는 지금도 많은 사람 마음에 감동을 전한다. 운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의 품격’은 물론 ‘삶의 품격’까지도 높여놓았다.




불행처럼 보이는 삶 속에서 희망을 품고 행복을 만드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 어떤 내면의 힘이 그들을 웃게 하고 감사한 마음을 품게 했을까?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집착을 내려놓는 마음’이다. 동시에 믿음은 충분히 가졌음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다. 만약 패니 크로스비가 잃어버린 시력에 집착했다면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의사를 죽을 때까지 증오했을 것이다. 저세상으로 떠난 소중한 아이에게 집착했다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원망했을 수도 있다. 증오와 원망은 삶을 불행으로 이끈다. 심지어 곁에 있는 다른 소중한 것까지 빼앗아 간다. ‘집착’은 우릴 ‘결핍’으로 밀어 넣는 마음 태도이기 때문이다.




패니 크로스비는 집착 대신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담대히 받아들였다.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며 곁을 지키는 남편에게 감사했고 건강한 다리로 마음껏 다닐 수 있음에 감사했다. 아름다운 찬송시를 써서 많은 사람에게 전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긴 세월 동안 이토록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패니 크로스비는 자기가 받은 많은 것들에 감사하며 평생 행복하게 살았다. “저는 눈을 감은 덕분에 다른 이는 결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눈을 감은 세상에서 ‘다른 아름다움’을 보았던 그녀였기에 세상이 감동하는 찬송시를 그렇게나 많이 썼을 것이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감동을 전한 또 한 사람이 있다. 악성(樂聖)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다. 악성이란 음악의 성인이란 뜻이다. 악성 베토벤에 의해서 탄생한 수많은 음악은 2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가슴에 경이로움을 전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베토벤이 작곡한 많은 위대한 작품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10대 소년 시절, 어린 베토벤은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동생들을 돌보는 소년가장이었다. 20대 청년 시절, 귀에 문제가 생기면서 청력을 잃어갔다. 그 외 수많은 신체 질병 때문에 대부분 시간을 고통 속에서 살았다. 베토벤이 작곡한 많은 위대한 작품이 고통의 순간에 만들어진 거다.




베토벤 역시 사람이다. 소리를 듣는 건 그에게는 생명처럼 중요한 일이었다. 20대 중반, 드디어 성공의 궤도에 올랐을 때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귀에서는 통증은 물론 ‘윙윙, 찡찡, 삐익’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댔고, 결국 치료에 대한 희망마저 사라졌다. 소리를 잃은 절망 속에서 베토벤은 두 동생에게 유서를 썼지만, 서랍 속에 꼭꼭 숨겼다. 자신을 괴롭히는 마음속 절망을 모두 쏟아내니 희망이 보였고 살아갈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악상을 다 쓰기 전에는 이 세상을 떠나지 않겠다’ 삶과 죽음의 순간에 그가 선택한 것은 내면에 살아있는 음악의 열정이었다.




베토벤은 ‘소리가 없으면 죽음이다’라고 외쳤던 마음의 집착을 ‘내 안에 있는 아름다운 선율을 내놓겠다’라는 열정으로 바꿨다. 덕분에 신체적 고통과 음악적 한계를 모두 뛰어넘는 세계적인 악성이 되었다. 소리를 잃었는데 어떻게 작곡 활동을 했을까? 모든 악기가 내는 소리의 진동을 하나씩 몸으로 느끼면서 음표를 그려나갔다. 베토벤은 소리를 듣지 못함은 물론 앞을 잘 볼 수 없었기에 더욱 촉각에 집중했다고 한다. 고통 속에서 베토벤이 선택한 음악의 열정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을 선사한다.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고난을 극복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헬렌 켈러가 한 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고난이 있고, 고난을 지혜롭게 극복한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남다른 영감을 선물해준다. 어느 날 우연한 사고로 오른손을 잃는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까? 그동안 계획했던 일이 산산 조각나고 사회가 기회마저 빼앗아 간다고 느껴지면 세상을 살고 싶기는 할까? 오른손을 잃었지만 새로운 꿈을 꾸었고 사회적 냉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면서 꿈을 이룬 한 사람을 소개한다. 많은 사람에게 동기부여 되었던 저서, 『모티베이터』 저자 조서환 회장님이다.




“스물세 살 육군 소위 때 부대에서 사고로 오른손을 잃었다. 쓰러지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피가 터져 나오고 머리는 깡통 찌그러지듯 오그라들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얀 천사들이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의식을 잃었다” 『모티베이터』 책장을 넘기자마자 처음 나오는 구절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오른손을 잃고 군인으로서의 안정된 삶은 완전히 끝났다. 대신 마케팅계의 전설로 당당히 이름을 빛내는 다른 삶이 시작되었다.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에 더 큰 시작을 준비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조서환 회장님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서도 아니고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줄 누군가가 있어서도 아니다. 마음에 간직하고 있던 사랑과 믿음이 새로운 시작을 하게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던 간절함, 자신에게 충분한 능력이 남아있다는 강한 믿음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귀한 사람으로 대하는 마음의 품격이 귀한 삶을 선물 했을 것이다. 사고 전에는 리더십있는 평범한 군인이었다. 사고 후에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상품을 1등으로 이끈 마케팅의 귀재이자, 진정한 모티베이터가 되었다.




조서환 회장님이 최고의 마케터로서 성공하기까지 탄탄대로였던 건 아니다. 입사 면접을 보던 순간부터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재가 되기까지 수많은 편견과 고난,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분노와 좌절을 수없이 느꼈을 테지만, 감정을 다스리고 오히려 더 크게 웃었다고 한다. “진정한 자존심은 책임감이다. 악조건도 자신을 단련하는 토대로 만드는 것. 결국은 이루어내는 것.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든 하는 게 자존심이다. 나를 최고라고 여긴 아내와 아들의 믿음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모티베이터』의 한 구절이다. 때론 부당한 현실 속에서 수많은 불가능에 도전했던 경험이 ‘마케팅의 신, 모티베이터 조서환’이라는 수식어구를 만들어 냈다.




로마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을 괴롭고 슬프게 만드는 일들은 마음을 단련하는 시련이다. 쇠는 불에 달구어야 강해진다. 지금의 시련은 마음을 더 강하게 다지라는 신의 뜻이다” 우여곡절이 없는 인생은 없다. 예기치 못한 불운이 찾아오기도 하고, 불운이 지나간 자리에 행운이 오기도 한다. 행운과 불운이 오가는 삶 속에서 행복을 찾고, 삶의 품격을 높이고 싶다면 마음의 품격을 먼저 높이면 된다. 마음의 품격이란 운을 대하는 마음 자세라고 앞서 말했다. 행운과 불운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까?




불운이 찾아왔을 때 좌절과 원망으로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고 불운을 대접하자. 대접을 잘 받은 불운은 곧 다가올 행운을 약속하고 떠나간다. 불운을 대접한다는 건 현재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이는 마음 태도를 말한다. 불운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정하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든 있을 수 있는 사건으로 인식하는 거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정말 죽고 싶어’라는 내면 대화가 많아질수록 불운의 모습은 점점 험악하게 변한다. 대신 ‘이만한 게 다행이지, 괜찮아. 이 순간은 곧 지나갈 거니까. 난 이제부터 뭘 하면 될까?’ 이렇게 불운을 담대하게 받아들이면 불운은 충분히 대접받았다 생각하고 떠난다. 곧 있으면 다가올 행운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행운이 우릴 찾아오면 자만심으로 마음을 오염시키지 말고 행운을 대접하자. 행운을 대접한다는 건 공짜로 얻은 축복에 감사하면서 다른 사람과 나누는 거다. 100% 자기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건 없다. 많은 축복 에너지가 우릴 감싼 덕분이다. 우릴 찾은 ‘귀한 행운’을 단지 내 노력의 대가인 것처럼 생각할 때 마음속에는 집착과 욕심이 자라기 시작한다. ‘이건 모두 내가 잘해서 그런 거야. 얼마나 노력했다고. 당연히 내 것이지’ 이런 내면 대화는 행운에 대한 감사함을 잊게 한다. ‘내가 노력을 할 수 있었던 것, 이룰 수 있었던 것, 모두 운이 따랐기 때문에 가능했어. 이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나눌까’ 감사와 나눔은 더 큰 감사의 기회를 준다.




착한 인생을 살아도 불행해 보이고, 못된 인생을 살아도 행복해 보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불운과 행운을 받아들이는 마음 태도다. 다른 사람 행복과 내 불행을 비교하면서 자신을 비관하느라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마음의 눈이 점점 어두워진다. 이 때문에 내면의 가능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불행이 인생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고 산다. 내면을 가득 채운 불운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 마음은 온갖 잘못된 노력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귀한 대접을 받기 위해 세상에 왔다. 우리를 귀하게 대접할 가장 가까운 이는 자신이다. 마음을 귀하게 여기자.




마음속 비교를 멈추면 가능성이 보인다. 삶에 대한 비관을 멈추면 하고 싶은 열정이 생긴다. 눈을 잃은 사고, 귀를 잃은 사고, 손을 잃은 사고가 있었기에 위 세 사람은 내면에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깨울 수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사고는 한순간 우연히 다가온 불운이 맞다. 하지만 불운을 대하는 마음 태도가 여느 사람과 달랐다. 사고를 겪은 자신을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남들과 조금 다른 것을 인정하고 불편을 채우려는 집착을 내려놓았다. 오직 원하는 것에만 집중했더니 세상이 놀랄만한 결과를 만든 거다. 사람은 모두 대단한 잠재력이 있고, 사는 동안 충분히 이룰 수도 있다. 운을 대하는 마음의 품격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전 06화 나와 소통하면 세상과 통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