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나에게 어떤 말을 들려줘야 할까?
‘난 왜 이렇게 저들만큼 잘나지 못할까?’ ‘난 역시 안돼’ ‘꿈이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이루어지지도 않을 텐데’ ‘나 따위가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아무도 만나기 싫어. 차라리 혼자가 편해’ 마음으로 이런 말을 수없이 되 내면서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난 자존감이 낮아서 그래’라고 속으로 말하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마비시키고 있다. 원래는 꿈도, 희망도, 멋있게 살고 싶은 소망도 있었다. 어느 순간 꿈, 희망, 소망 등을 찾을 수 없는 곳에 묻어버리고 절망을 움켜쥐고 사는 나. 자존감이 낮다는 변명을 해보지만, 진짜 마음은 잃었던 꿈, 희망, 소망을 찾고 싶은 게 진심이지 아닐까.
우리가 이 세상에 처음 왔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작고 귀한 생명체로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던 시절, 우리 자존감 만큼은 한 집안을 가득 채웠다. 당당하게 울면서 먹을 것을 요구했다. 큰 소리로 우는 건 “날 안아주세요. 날 재워 주세요”라는 메시지였다. 그 작은 아이가 뭐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 작은 아이의 자존감은 어떨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높을 거다. 어느 순간 높았던 자존감이 낮아진 건 안 들어도 되는 세상의 말들을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자존감을 높여야 할 순간이다. 우리 자존감을 높이는 말은 자신을 향한 존중의 말이다.
2018년 개봉했던 영화 「아이 필 프리티」에서 여러 이유로 자존감 낮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르네는 뚱뚱하고 예쁘지 않은 자신의 외모를 부끄러워한다. 예뻐 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한 현실 속에서 언제나 자신감이 없다. 다이어트를 해서 예뻐지고 말겠다고 결심한 르네. 스피닝 시간에 열정적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면서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고, 덕분에 그녀에게 기적이 일어난다. 자기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날씬한 여성으로 보이는 기적이다. 그녀의 삶은 이전과 180도 달라진다. 말투, 성격, 적극성 등 그녀의 매력은 주변 사람을 사로잡고도 남는다.
주인공 르네가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 후에 달라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영화 제목 「아이 필 프리티」처럼 일시적인 두뇌 이상으로 자신을 아름답게 느끼는 게 다였다. 르네가 진심으로 자신이 아름다운 여성임을 믿으니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게 변했다. 멋진 남성들이 그녀에게 반하고 모델 외모를 가진 여성 동료들조차도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다.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죠? 당신은 자신을 잘 알고 세상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아요. 정말 자기다워요” 자신감 넘치는 르네의 모습을 사랑하게 된 남성의 고백이다.
자신에 대해 확신이 없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에게는 분명 많은 장점이 있는데도 부정적인 모습에 집착해서 멋지고 근사한 모습들을 놓쳐버린다. ‘나다운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까맣게 잊고는 세상이 정한 ‘세상다운 모습’이 자존감 기준이 되어버렸다. ‘진짜 내 모습은 좋아하지 않을 거야’라고 속으로 말하면서 진짜 모습은 숨기고 세상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아주 어린 시절 우리 자존감은 제법 그럴싸했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정한 멋진 모습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자존감은 서서히 낮아졌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순간 자존감은 땅으로 꺼지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일 때 우리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외모와 상관없이요. 어느 순간 타인 정한 규정을 믿으면서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하죠. 결국, 자신감을 잃어요” 「아이 필 프리티」에서 주인공 르네가 한 말이다. 처음 우리는 얼마나 멋진 모습이었을까. 다만 ‘비교’가 만든 저주 때문에 잠시 자존감이 낮아졌을 뿐이다.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멋진 자존감을 되찾는 방법은 자신을 존중하는 소통을 하는 거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성공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내가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나 자신을 존중하라” 나를 높이는 것, 절망의 끝에 서 있는 나를 구하는 것 자신을 높이는 ‘존중’이다.
세상 기준에 맞추고 타인과 비교하느라 외면했던 자존감을 다시 찾자. 귀한 자존감을 높이는 존중소통은 어떻게 하는 걸까? 자존감을 되찾는 존중소통, 첫째는 자신을 지키는 ‘정직한 기준’을 정하는 거다. 자신을 존중한다는 건 각자 내면에 ‘정직한 기준’을 세우고 타인의 요구와 기대치를 지혜롭게 수용하는 태도를 말한다. 자신이 정한 ‘정직한 기준’이 없다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구분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어느새 다른 사람이 정한 기준이 우리 삶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타인이 정한 기준에 얽매여서 산다면, 우리는 평생 자신을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비교하며 살게 된다. ‘내가 잘하는 거 맞을까?’ ‘아무것도 모르겠어. 난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 ‘저 사람은 저렇게 하는데, 나는 왜 이럴까?’ 우리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기계에 꼭 맞아야 하는 부품이 아니다. 세상 사람이 말하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건 멈추고 나를 지키는 ‘정직한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지휘하는 삶을 살자. 이런 모습이 제대로 자신을 존중하는 삶이니까. 자신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사람이 타인을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다.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 나를 존중하기 위해서 새운 ‘정직한 기준’이 결국은 나와 타인을 지킨 셈이다.
자신을 존중한다는 건 마음속에 ‘정직한 기준’을 정하고, 타인의 요구와 기대를 지혜롭게 수용하는 태도라고 했다. 나를 지키는 ‘정직한 기준’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꼭 필요한 건 채우고 그렇지 않은 건 사양하는 걸 말한다. 나에게 맞는 ‘채움’과 ‘사양’을 지혜롭게 선택하는 기준이 정직한 기준이다. “네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박사 학위쯤은 있어야 해. 박사 학위는 필수야” “적어도 이 정도 차는 몰고 다녀야지” “대박 정보가 있어. 너한테만 말해주는 거야. 투자해 보는 게 어때?” “나름 외모가 괜찮은데, 여기만 고치는 게 어때?” 우리더러 채우라고 말하는 수많은 목소리가 있다. 이 때문에 내가 채워야 할 게 무엇인지 구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가족, 친구, 선배, 지인이 우리에게 ‘새로운 채움’을 권하는 이유는 우릴 챙기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은 정성으로 받되, 되도록 사양하자.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이렇게 화답할 수 있다. “챙겨줘서 고마워. 지금은 사양할게” “좋은 생각이야. 근데 지금은 다른 것 먼저 할게” 솔깃한 그들의 제안을 사양했다면, 이번엔 나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사양해도 괜찮아. 난 지금도 충분해’ ‘사양하길 잘했어. 난 나다움을 찾을 거야’ 우리가 그토록 채우려고 하는 이유는 마음속 불안 때문이다. 뭔가 허전한 느낌, 부족한 느낌, 나만 없는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채움을 부추긴다. 지금 이대로의 자신을 믿어도 된다. 나를 향한 믿음은 ‘채울 것’과 ‘사양할 것’을 구별하게 하고, 세상이 정한 기준이 아닌 내가 정한 기준을 살게 한다.
낮은 자존감을 높이는 존중의 말, 둘째는 배짱으로 사는 거다. 배짱이란 세상이 말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외치는 용기를 말한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게 배짱이다. 자신을 향한 믿음과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배짱으로 살 수 있다. 우리가 불안함을 느낄 때, 사는 게 두려울 때, 끊임없이 채우길 갈망한다. 불안과 두려움을 잠재우는 비결은 자신을 강하게 믿는 마음이다. 언제 어디서든 나를 믿는 마음, 나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배짱으로 당당히 살 수 있다. 배짱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가 마음으로 외쳐야 하는 말은 이렇다. ‘난 충분해. 내 안에 온갖 좋은 것들이 차고 넘쳐’
사람은 믿음 하나로 자신의 내면을 원하는 것들로 가득 채울 수 있다. ‘내 안에 생명이 넘친다’ ‘내 안에 희망이 넘친다’ ‘내 안에 당당한 기세가 넘친다’ ‘내 안에 좋은 기운이 넘친다’ ‘내 안에 치유와 회복이 넘친다’ 등 수많은 좋은 것들이 우리 내면에 흘러넘친다는 걸 믿고 선언하면 된다. 그동안 우리 마음속에 원치 않은 것들이 가득했다면 우리가 원치 않은 것들을 외쳤기 때문이다. ‘난 뚱뚱해’ ‘난 못생겼어’ ‘난 못해’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아’ ‘난 자신감이 없어’ ‘난 대인관계가 두려워’ 이런 말들은 마음을 불안하게 해서 ‘채움’을 자극한다. 이제는 당당히 외치자. ‘온갖 좋은 것이 내 안에 흘러넘친다’
성직자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조셉머피 박사는 저서 『잠재의식의 힘』에서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는 단 한 가지 치유력이 존재한다. 바로 잠재의식의 힘이다. 잠재의식 속에 있는 생명의 원리가 몸과 마음을 회복시킨다. 생명의 법칙은 믿음이다. 원하는 결말을 상상하고 현실로 느끼면서 믿어라” 우리 자존감을 갉아먹고 마음을 병들게 하는 건 사실 외부에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 외부 대상이 내 자존감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잘못된 믿음이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알고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시다. 믿음이 그 사람을 만드는 거다.
‘말이야 쉽지. 가진 게 없는데 배짱 있기가 쉽겠어?’ 이런 의심이 들 수도 있다. 배짱 두둑하고 싶은 간절함을 담아서 이 말을 외쳐보자. ‘난 충분해. 내 안에 기쁨, 건강, 만족이 차고 넘쳐’ 가진 게 많으면 누구나 자존감이 높을 수 있다. 당당하고 기백이 넘친다. 우리는 이들에게 ‘당연해’라고 말한다. 대신 가진 건 쥐뿔도 없는데 당당한 사람에게는 ‘대단해’라는 찬사를 보낸다. 진정한 자존감이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영화 「아이 필 프리티」에서 르네가 날씬하고 예뻤다면 당당한 모습이 당연해 보였을 거다. 뚱뚱하고 평범한 르네였기에 세상을 다 가진 듯 당당한 모습이 우리를 더욱 매료시켰다.
미국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의 영부인, 로잘린 카터는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의 능력을 믿어라. 그 믿음을 굳세게 밀고 나가라” 자존감을 높이건 생각보다 간단하다. 스스로 존중받을 만한 사람임을 먼저 굳게 믿는 거다. 우리가 정한 정직한 기준은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사양할지 분별하는 지혜를 준다. 배짱으로 사는 당당한 태도는 자신에게 넘치는 잠재력이 있음을 믿게 한다. ‘난 소중해’ ‘난 날 존중해’ ‘내 안에 귀한 것들이 차고 넘쳐’ 우리 가치를 인정하는 말은 자신은 물론 타인의 가치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삶의 태도를 만든다. 우리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은 ‘세상다운 나’가 아닌 ‘나다운 나’다.